77. 순천 신앙의 어머니, 순천중앙교회이야기
▲순천중앙교회
전라남도 순천지방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한국교회 수난사의 1번지이다. 순천읍교회(현 순천중앙교회)는 이 지역의 첫 번째 교회로, 1907년 4월15일 금곡동 향교샘 부근의 양사재(養士齋)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되었다.
한국인에 의해 자발적으로 세워진 순천읍교회에 1907년 프레스톤(1875~1975. J. F. Preston한국명: 변요한)이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프레스톤은 미국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1903년에 내한하여, 1940년까지 37년간 목포 광주 순천 등에서 선교사와 교육자로 활동하며, 호남지역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1940년 일제의 압력으로 미국으로 귀국하여 활동하다가, 1975년 100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변요한 선교사는 교육사업에도 헌신하였다. 순천시 매곡동 순천매산학교(중학교, 남녀 고등학교)는 1910년 3월 변요한, 고라복 선교사에 의해 개교되었고, 고라복 선교사가 초대교장으로 부임했다. 순천매산학교는 일제치하의 수난 속에서도 성경을 정규과목으로 인가받아 가르치는 등 믿음을 지키며 애국심을 고양시켰고, 해방 후에는 목회자를 비롯한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폐교와 개교를 거듭하며 운영에 어려움도 많았지만 100년의 역사를 이어 6만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며 지금까지 미션스쿨로 굳건히 서 있다.
1920년 순천중앙교회 제3대 담임으로 이기풍 목사가 부임하였다. 그는 평양신학교에서 배출한 한국최초의 목사 7명 중 한 명으로 제주도에 처음 복음의 씨를 뿌린 목회자이기도 하다. 이기풍 목사는 순천중앙교회 시무 당시 제9회 총회에서 부총회장으로 피선되었고 1921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총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0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여수 우학리교회 시절 일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투옥되었고 고문 후유증으로 시달림을 겪다가 순교자의 반열에 섰다. 1924년 부임한 곽우영 목사는 순천중앙유치원을 개원하고 1935년 교회당을 개축하였으며, 1936년 승주교회(현 순천제일교회)를 세워 분립하였다.
▲순천장로교회 장로임직
1938년 제7대 담임으로 독립운동가인 박용희 목사가 부임하여 청년면려회 성경반(원탁회)을 만들었다. 간디가 인도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모임 이름에서 따온 원탁회는 1939년 초부터 황두연 장로의 집에 모여 예배드리며 일본의 황국신민화 정책을 비판하고 독립자금 모금운동을 벌이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회장인 강창원의 집에 일본경찰이 들이닥쳐 일기장과 회의록 등을 압수하여 그 내용을 빌미로 박용희 목사, 황두연 외 6명의 장로가 옥고를 치른다. 그리고 일제는 애양원에서 목회를 하던 손양원 목사 등 순천노회 15명의 목회자 전원을 배후세력으로 지목하고 구속했다. 이 일로 한때, 순천노회 소속 교회들은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969년에는 인 휴(Hugh Linton) 선교사가 임시 당회장으로 시무하였다. 인 휴 목사는 호남 선교의 아버지 유진 벨(Bell Eugene) 선교사의 외손자로 전라남도 도서(島嶼) 지방을 중심으로 200여 곳에 교회를 개척하는 등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하여 병원으로 이송도중 생을 마감하였다. 한편 순천중앙교회 뒤편에 위치한 순천기독진료소는 휴 목사의 부인 베티(한국명 인애자)여사가 1960년에 개원한 결핵전문 요양기관이다. 베티 여사는 결핵재활원을 운영하며 30년 이상 결핵퇴치사업을 전개해온 공로로 국민훈장, 호암상을 받았다. 그의 아들 북한 결핵퇴치운동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인요한박사는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쎈터 원장으로 있다. 한편 배티여사가 남긴 한국 119구급차 운영사업이 이루어지게 된 계기는 또 하나의 사연이 있다. 그의 남편 인휴목사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119구급차만 있었다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시스템이 없어서 아까운 생명의 손실을 절감하면서 그는 미국으로 가서 119구급차를 주문하여 들여옴을 계기로 한국에 119구급차의 시초가 되었다.
▲순천중앙교회 역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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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가 많아 한국교회 수난의 대표지로 손꼽히는 순천중앙교회를 비롯한 전라도 지방의 교회역사 속에는 수많은 선교사들과 신앙선조들의 순교와 희생이 뒤 따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선교사들이 들어와 일찍이 복음과 교육, 의료의 혜택을 누림으로 비교적 낙후된 이 지역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고 민주화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이제는 지역복음화와 해외선교 등으로 미국 선교사들에게 진 복음의 빚을 갚고자 매진함으로 한국교회의 훌륭한 본보기가 되고 있다. 순천중앙교회의 숨겨진 역사를 말하자면 한이 없다.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순천 신앙의 어머니인 순천중앙교회역사를 묵상해 본다.
-주소: 전남 순천시 매곡동 144-2번지 (담임 임화식 목사)
사진 -글 : 진흥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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