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지역의 첫 번째 자생적으로 세워진- 신대교회
110여 년 전에 충북지역에 최초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다. 신대리에 살던 오천보, 문성심, 오삼근 등은 농한기에 서울을 오가며 행상을 했다. 한번은 그들이 서울을 다녀오던 길에 경기도 죽산마을 ‘둠벙리교회’에서 열리고 있는 사경회에 참석했던 것을 계기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마을로 돌아와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서투른 용어로 전도하기를 시작하여 계속 힘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주막을 빌려 흰 광목에 십자가와 태극기를 그려 놓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때가 1900년 10월 3일로, 이 주막교회가 이제껏 보고된바 충청북도 최초 교회인 신대교회가 시작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 신대교회 전경
이들은 본래 성경지식이 없었으므로 둠벙리교회에서 듣고 체험한 것을 토대로 뱃노래 가락에 성경내용을 가사로 인용하여 찬송가로 부르기도 하면서 열심을 다했다. 교회가 부흥하고 점차 사람이 많이 모이면서 시작한 주막교회에서는 한국 교회사에 유례가 없는 독특한 교제로 회자되기도 했는데, 바로 ‘막걸리를 마시면서 교제하는 교회’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에서 어떤 거부감 보다는 한국 초기 교회들과 선교사들의 애환을 엿볼 수가 있어 한층 더 재미있는 교회사로 남았다.
한편, 오천보 일행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껍질을 깨고 거목으로 자랄 수 있도록 교회의 기반을 닦은 사람은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견한 밀러(F. S. Miller, 1866~1937 한국명: 민노아) 선교사였다. 그는 1890년대 후반부터 경기 남부지역 선교를 담당해 순회 전도활동을 하였다. 1900년 어느 날 청주 장터에 들렀다가 신대교회 소식을 접하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적극 지원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는 먼저 이찬규 조사를 파견해 예배를 인도하고 교인들을 올바른 기독교 교리에 맞도록 지도하게 하였다. 그런데 밀러 선교사의 지원이 황당한 결과를 낳기도 했는데, 그것은 주막교회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술손님이라고 반기던 주막 주인이 서울에서 온 밀러 선교사가 “술 먹으면 집안 망하고 죽어서 지옥 간다.”라고 설교하는 것을 듣고 그만 화가 나서 빗자루를 휘두르며 영업방해 한다고 쫓아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결국 주막교회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고, 이찬규 조사는 1901년 오천보의 집을 다시 예배처소로 옮기고 이후 교인들의 헌금으로 오천보의 집 옆에 있는 초가삼간을 구입해서 예배당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이제야 비로소 신대교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아무튼 이런 우여곡절 끝에 예배당을 마련한 신대교회 교인들은 주변지역으로 활발하게 전도활동을 벌였는데, 대표적으로 윤홍채 조사는 보은군과 괴산군 등지를 다니며 복음을 전해 법주리교회와 공림리교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1905년 11월에는 창립에 기여한 오천보를 신대교회 제1대 장로로 장립하게 되었다. 또한 민노아 선교사는 오천보 장로의 부인 이춘성의 남다른 열심과 독실한 신앙을 보고 1910년 평양신학교에 추천하여 보냈다. 열정적으로 신학수업을 마친 이춘성은 충청도 지역의 전도에 주력했는데, 특히 그녀는 신유의 은사로 정신병 환자를 고쳐서 많은 결신자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이춘성은 ‘전도부인’이라고 불리며 민노아 선교사와 함께 충청도 일대에서 순회 전도를 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을 했다. 그 후 충남 아산, 홍성, 당진, 예산 일대까지 전도영역을 넓혀갔다. 그 결과 주변 지역에 많은 예배처소가 생겼다. 청주지역 초기 선교사들의 보고서에서 자주 언급되었던 뛰어난 전도부인, 오씨 부인(Mrs. Oh)이 바로 이춘성이다.
▲ 기독교전래기념비
1945년 10월 3일 해방 직후, 장로 장립을 받은 오을석 장로는 사회가 혼란한 가운데서도 교회를 지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6·25전쟁을 겪으면서 교회자료가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당회록도 1970년대 이후의 기록만 있으며 교회터와 오천보 장로의 집터만이 100여 년 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현재의 붉은 벽돌 건물은 1977년 건립됐으며 교회 앞마당에는 ‘이춘성 전도부인 공덕비’와 해방 직후 어려운 상황에서도 교회를 굳건히 지킨 ‘오을석 장로 추념비’가 나란히 서 있다. 또한 마을 초입에는 ‘기독교전래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한편 1985년 2월 4일 한국기독교 선교100주년기념사업회 충청북도협의회는 청주지역 교역자와 평신도 등 초교파적인 참여와 충청북도의 지원을 받아 이 기념비를 세웠는데, 여기에는 신대교회와 충북지역 복음전파의 역사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충청도 지역에서 민노아 선교사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던 1904년보다 4년이나 앞선 1900년에 신대교회가 생기었고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복음을 받아드려서 예배와 성경공부, 전도 등의 활동을 해왔다는 사실은 한국기독교역사에서 주목되는 일이다. 지금도 신대교회는 비록 그 규모면에서 결코 크지 않지만, 교인들이 서로 사랑하고 도우며 과거 초대교회의 신앙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초기 예배당으로 쓰였던 오천보 장로의 집은 조카인 오영석 장로가 대를 이어 살면서 잘 보존하고 있다. 신대교회는 충청북도에서 최초의 교회이자 자생적으로 생긴 교회라는 점에서 한국교회의 ‘고향교회’라 불릴 만한 교회이며 동시에 한국기독교역사에서 갖는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주소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신대동 426
-글 : 진흥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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