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한국기독교 초창기 대부흥사 - 김익두 목사
마펫(S.A. Moffett, 마포삼열), 그레함 리(Graham Lee, 이길함), 스왈렌(W.L. Swallen, 소안론)선교사는 평양선교의 개척자들이다. 마포삼열의 주도로 1901년 평양에 장로교신학교가 설립되자 이들은 신학교육에 적극 힘을 기울였다.
▲김익두 목사(1874-1950)
이들 중 스왈렌(소안론: 1859-1954) 선교사는 미국 오하이오 주 태생으로, 1892년 한국에 왔다. 이후 1901년에 평양으로 전도 거점을 옮겨 1932년 73세의 나이로 명예 은퇴할 때까지 원산, 평양 등을 중심으로 48년 동안 한국에 머물며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는 황해도 재령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황해도 일대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였는데 1900년 안악 장날에 안악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열었을 때의 일이다. 소안론 선교사 부인도 안악 장터에 나가 전도지를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깡패 김익두 청년이 나타났다. 그에게 전도지를 건네며 서툰 한국말로 “오늘 밤 안악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하니까 꼭 나와 보세요.” 하자 김익두는 그 자리에서 전도지에다 코를 풀었고 그 모습을 본 소안론 선교사 부인이 “그렇게 하면 당신 코가 썩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날 김익두는 만취가 되어서도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혹시라도 자신의 코가 썩을까 걱정하며 뜬 눈으로 밤잠을 설치며 지난날의 잘못들이 하나하나 머리에 떠올랐다. 그 이후 절친하던 박태환의 전도로 안악군에 있는 금산교회에 나가면서 믿음을 갖고 입교를 했는데 그것이 1900년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김익두 목사의 군산 천막집회(1930)
김익두(1874-1950)는 황해도에서 이름난 깡패였다. 난폭한 성격 탓에 ‘안압골 호랑이’라 불렸는데, 안압읍 장날이면 장꾼들은 장에 가는 길에 성황당에서 그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 정도였다. 기독교인이 된 김익두는 10개월 동안 언행을 삼가며, 자신의 생활습관을 정리하였는데, 이때 신약성경을 100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세례받을 준비를 하며 성경을 읽고 있을 때 평소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찾아왔다. 워낙 가깝게 지내던 술친구이기에 그는 예나 다름없이 “주막에 가서 대포나 한잔 하세.”라고 하자, 김익두는 펄쩍 뛰면서 “내가 요새 구약과 신약을 복용 중인데, 술은 절대 금물이라는 처방이 있어서 안 되겠네”라고 하며 위기를 모면 했다고 한다.
김익두는 1901년 1월에 소안론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매서인(賣書人)이 되었는데, 조롱을 당하고 돌에 맞으면서도 과거의 잘못을 생각하며 겸손히 참고 전도했다고 한다. 이에 소안론 선교사는 1903년에 김익두에게 신천교회의 개척을 맡겼다. 그의 열심 있는 전도와 설교에 은혜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교회는 급성장했다. 김익두는 1906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 3회로 졸업하고, 1911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한편 1919년 10월의 어느 날, 평안남도 한 교회에서 집회를 마친 김익두 목사는 동료목사와 함께 ‘믿는 자에게는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방언을 말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16:17-18)는 말씀으로 토론을 하던 중, 마침 옆에 있던 앉은뱅이에게 다가가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고 외쳤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그길로 자신에게 믿음과 능력주시기를 간구하였다. 그러던 중 그해 12월 경북 달성의 현풍교회 부흥회에서 아래턱 기형 환자 박수진이 고침을 받았고 이듬해 9월 부산진교회에서는 8년 동안 걷지 못하던 앉은뱅이 소년, 등 굽은 곱사병자, 한센병 환자, 폐병 환자, 혈루병자 등 많은 병자들이 치유 받는 집단적 기적현상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김익두 목사는 신유부흥사로 전국에 이름이 알려 졌고 가는 곳마다 불치병 환자들을 비롯하여 그가 부흥집회가 열리는 날에는 갖가지 병자들을 비롯하여 밀려드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핍박의 거센 세파가 거침없이 몰아쳤다.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라고 강하게 외치는 그에게 일경의 탄압은 날로 심각하게 다가 왔다. 일제강점기 말엽에는 핍박이 극에 달했는데 그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로 맞서며 수난을 극복했다. 그 뿐만 아니라 해방 후에는 여러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겪은 공산주의자들의 횡포에 맞서야 했다. 마침내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10월14일 새벽 공산군이 교회당 안으로 난입하여 새벽기도를 드리던 김익두 목사와 성도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이 일로 김익두 목사는 신도 5명과 함께 예배당에서 공산당의 총탄에 순교를 당하였다.
▲김익두 목사
김익두 목사는 부흥사경회를 무려 770여회나 인도하였고, 150여 교회를 설립했으며, 1만여 명의 불치병 환자들을 구해 내었으며, 또한 그로 인해 목사가 된 사람도 2백여 명에 이른다. 지나칠 정도로 성령주의와 전도주의로 ‘고등 무당’ 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지만, 그는 분명 하나님께서 크게 들어 쓰신 한국의 큰 목회자, 한국선교 초기 대부흥사 이었다. 그를 통해 일어난 치유와 부흥의 기적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회심이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번진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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