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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76>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사람’ - 헐버트 선교사

박경진 2016. 5. 16. 16:22

76.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사람’ - 헐버트 선교사


구한말, 고종황제는 <육영공원>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 설립을 계획하고, 미국 정부에 교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3명의 젊은이들이 언어교사로 오게 되었는데, 그중 한 명이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이다.


▲헐버트 선교사


헐버트는 유니온신학교 2학년 때인 1886년에 육영공원의 교사로 초빙되어 동년 7월 4일, 다른 초빙교사인 벙커(D. A. Bunker), 길모어(G. W. Gilmore)와 함께 내한하였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재정 형편상 육영공원을 축소 운영하면서 교사들에 대한 급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자, 1891년 12월 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는 1893년 9월 목사 안수를 받고, 감리교선교회가 한성에 세운 삼문출판사의 2대 사장으로 선임되어 미 감리교회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내한했다. 헐버트는 삼문출판사 책임자로 있으면서 서재필을 도와 <독립신문>(1896.4.7 창간)의 탄생에 깊게 관여하기도 했다.

1895년 을미사변 때 고종의 신변보호를 위해 존스, 게일, 언더우드, 애비슨 등 미국 선교사들과 교대로 고종을 호위하기도 했다. 또한 “황성기독교청년회(한국 YMCA)”를 설립하여 근대적인 사회개혁의식 고취를 통해 청년들을 미래의 지도자로 양성하고자 하였다. 헐버트가 YMCA운동을 사회운동의 성격을 띤 청년운동으로 발전시키려 한 탓에 순수 신앙운동으로 전개하려고 했던 언더우드 선교사와는 대립적이어서 선교 초기에는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으나 한국 YMCA운동은 헐버트의 주장대로 방향을 잡아가게 되었다. 창설 준비위원장이던 헐버트는 1903년 한국 YMCA 초대 회장에 선출되기에 이르렀다.


▲헐버트 선교사 - 1949년 내한 때 모습


한편, 1905년에 일본은 미국, 영국, 러시아와 차례로 ‘가쓰라-태프트밀약’(7월), ‘영일동맹’(8월), ‘포츠머드조약’(9월) 등을 맺으면서 한국병합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5년 10월 중순 한국정부는 헐버트를 특사로 임명하여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고종황제의 친서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한국지배를 묵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종황제의 노력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1906년 6월 다시 한국에 온 헐버트는 고종황제와 한국 YMCA 회원들에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파견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특사위임장을 받아 1907년 6월에 열리게 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파되어 헤이그에 직접 가서 이상설, 이준, 이위종 특사들의 활동을 적극 도왔다. 하지만 헤이그 특사 파견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끝내 이 분통함을 억제하지 못한 이준(순국열사殉國烈士)은 할복자결로 세계만방에 호소하였다. 마침내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한반도를 병합하여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의 국권 회복운동에 적극 협력한 헐버트는 일제의 눈총을 받으며 그들의 수작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1908년 한국에서 추방당하고 말았다.

추방 후에도 그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하여 목사로 활동하면서 3·1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8월 미국 상원에 진술서를 제출하여 일본의 잔학상을 면밀하게 고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해외의 조선유학생들에게 도움을 주었는데, 특히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에서 공부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고 3·1운동 후에는 이승만과 함께 “조선독립후원회”를 조직하여 미국에서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처럼 헐버트는 조선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그치지 않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적극 힘썼다.



▲헐버트 선교사의 묘


해방 후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헐버트와의 우정과 그의 조선 사랑을 기억하고 그를 초청했다. 1949년 7월 29일, 86세의 노인이 된 헐버트는 일제의 추방으로 한국을 떠난 지 42년 만에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그러나 그는 돌아온 지 일주일 만인 8월 5일 그렇게 사랑하던 한국 땅에서,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하던 그의 말대로 조용히 하나님의 부르심에 임했다. 대한민국은 국장에 버금가는 사회장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그의 소원대로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1950년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그에게 수여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묘비명을 쓰기로 약속했으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것을 타계 후 50년 만인 1999년 8월 5일, 비로소 김대중 대통령이 친필로 “헐버트의 묘”라는 묘비명을 썼다.

 

헐버트는 참으로 한국을 사랑하는 선교사였다. 일생을 두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쓰며 한국을 한시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추방되어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미국 각지를 돌며 강연을 통해 눈물로 한국과 한국인들의 억울한 사정을 대변해 주었다. 헐버트의 생애는 애국심과 박애주의 정신 등의 가치관이 희미해져 가는 오늘날 우리가 이어가야 할 소중한 가치관을 일깨워준다. 1949년 헐버트가 한국으로 오던 당시 미국 AP통신 기자가 한국에 다시 찾아온 데 대하여 감회를 묻자 가슴에 품고 있던 대로 그는 대답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글 : 진흥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