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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79> 존 헤론 선교사 부부와 게일선교사 이야기

박경진 2016. 6. 9. 17:11

79. 존 헤론 선교사 부부와 게일선교사 이야기

 

 존 헤론(John Heron 1856~1890)은 테네시대학교 개교 이래 최우수성적이라는 영예를 안고 테네시의과대학을 졸업했다. 학교 측은 그에게 모교의 후배양성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교수로 남아주기를 끈질기게 권유했고, 누가 봐도 그 길이 헤론에게는 장래가 보장되는 안정된 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헤론은 “미국사람들이여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주시오.”라는 이수정의 선교사 청원의 글을 읽고, 이는 사도바울을 유럽으로 건너오라고 손짓하던 마케도니아 사람의 손짓이요 부름이라 생각하고 조선선교사의 길을 굳게 결심했다.


▲존헤론


헤론은 약혼녀 해리어트 깁슨과 결혼식을 올리고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한 조선선교사 제1호의 임명장을 받고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했다. 헤론 선교사 부부는 일본에 머물며 이수정으로부터 조선의 문화와 풍속을 익히며 조선말을 배우다가, 1885년 6월 21일 마침태 조선에 입국했다. 존 헤론은 조선에 들어와서 알렌의 뒤를 이어 광혜원 제2대 원장을 맡았으며 고종의 주치의가 되었다. 그는 고종의 신임을 받아 혜참판이란 호칭이 붙기도 했다. 헤론은 광혜원을 특권층뿐만이 아닌 가난한 백성들도 돌보는 병원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이름을 ‘제중원(濟衆院)’으로 바꾸었으며, 덕분에 몰려드는 가난한 백성들을 돌보며 진료하기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한편 헤론은 제중원 제2대 원장으로 서울에서도 분주했지만 부산에 주재하던 영국세관원 헌트의 딸을 치료하기 위해 1890년 봄, 부산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캐나다에서 온 게일 선교사를 만났다. 헤론은 게일 선교사의 어려운 생활여건과 주변의 비위생적 상황을 둘러보고는 그의 생명이 심각한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서울로 올라올 것을 권유했고, 결국 게일은 부산에 온 지 9개월 만인 1890년 5월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헤론은 비록 조선에서 5년간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조선의 문명을 앞당기는 많은 일을 주도했다. 그 가운데 1890년 6월 25일,‘한국선교서회’ (현, 대한기독교서회)를 창설함으로써 조선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문서출판의 초석을 놓았으며 우선 게일을 그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게일


헤론은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게 한 후에 게일을 자기 집에서 기거하도록 조치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게일이 서울로 온 지 두 달 만에 헤론은 제중원의 격무에도 불구하고 지방에까지 위급환자들을 돌아보는 일에 지쳐 과로가 겹치면서 급성 이질을 극복하지 못하고 1890년 7월 26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조선 땅에서 크리스천 의사로서 가진 열정을 다해 섬기기를 5년, 한참 꽃필 나이 34세에 그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보상은 ‘순교자’ 였다. 마치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세상에 두지 않으시고 데려가신 것과 같았다. (창5:24)

 

헤론과 게일의 짧은 만남은 우리 눈에는 사소한 듯 보이지만, 정작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헤론과 게일 두 사람은 두어 달 후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급성 이질로 헤론이 급작스레 죽고 젊은 해리어트와 어린 애니와 제시, 자매만 남겨졌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어린 두 딸과 덩그러니 낯선 땅에 남겨진 심정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막막함 그리고 캄캄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때 해리어트의 외로움과 인생의 역경을 함께 헤쳐 간 사람이 바로 게일이었다. 헤론의 초청으로 서울에 올라온 총각 게일은 헤론이 사망하기까지 헤론의 집에 약 2달간 머물렀다. 그리고 이것이 인연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2년이 지난 1892년 4월 7일, 헤론의 미망인 해리어트와 총각 게일은 결혼을 했다. 당시 해리어트는 32세였고 게일은 29세 총각이었다. 결혼 후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은 1908년 해리어트가 사망할 때까지 18년간 훌륭한 남편으로 그리고 애니와 제시의 아버지로서 그들의 생활을 책임졌다. 만일 헤론이 부산에 내려가지 않았다면 게일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헤론의 초청에 게일이 승낙하지 않았다면 게일과 해리어트의 인연은 맺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 외에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게일은 해리어트와 결혼한 후 18년간 부부로 살다가 해리어트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육신을 첫 남편이었던 존 헤론의 곁에서 함께 자도록 양화진언덕에 합장을 시켜주었다.

한국기독교 선교역사의 한편에 기록된 위대한 헤론과 게일의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는 것은 그들이 우리보다 특별한 존재이어서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연약하면 질병에 걸려 죽기도 하고 홀로 남겨져 외로움에 처할 때도 있으며 누군가의 넓은 어깨와 따뜻한 가슴이 필요로 했던 나약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에게 동질감과 친밀감을 심어준다. 다만, 그들이 온전히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우리는 그들의 삶이 위대했음을 기억한다.

 

사진 -글 : 진흥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