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어머니 교회- 초량교회 이야기
▲초량교회 전경
부산지역의 기독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기둥은 바로 부산진교회와 초량교회다. 두 교회 모두 베어드 (William. M. Baird, 1862-1931 배위량) 선교사의 희생적인 헌신으로부터 시작되어 세워졌다. 특히 오늘 만나 볼 초량교회는 부산·경남지역에서 매우 중요하고 역사적인 한국기독교의 대표적 유적지이다.
1884년부터 미국 북장로회선교부는 인구 150만의 대도시이자 해상교통의 요충지인 부산지역 선교를 위한 선교기지를 마련하고자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1891년에 내한한 베어드 선교사를 부산지역 선교사로 공식 임명하면서부터 부산지역 선교가 의미 있는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1892년, 베어드 선교사는 한국의 최초교인이자 권서인으로 활약하던 의주출신 서상륜과 함께 부산을 포함한 남해안 일대를 순회하며 전도를 했는데, 중도에 서상륜은 건강악화로 한 달 만에 서울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베어드선교사는 실망하지 않고, 그해 11월 부산에 있는 자신의 선교관을 사랑방처럼 개방하여 동네 사람들의 모임장소로 제공하였다. 즉, 지역주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하면서 그 이름을 ‘영선현사랑방’이라고 지었는데, 이로부터(1892년 이후) ‘영선현사랑방’은 부산지역 복음화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사랑방으로 사용하던 ‘영선현’은 마침내 초량교회(구. 영선현교회)의 모태가 되었으며, 1902년 그 예배당의 아래쪽의 영주동사무소를 매입해서 주일학교로 사용하면서 그곳을 영주동교회라고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베어드 선교사는 1893년 12월 부산지역 최초로 8일간의 성경공부를 시작했으며, 1894년 4월22일에는부산지역에서 최초로 세례를 베풀었다. 이듬해(1895년)에는 5명의 아이들로 한문서당을 시작하는 등, 1895년까지 4년 동안 부산에 머물며 부산지역 복음화의 기초를 다졌다. 초량교회는 1895년 베어드가 대구로 이주한 후에도 미 북장로회에 의해 관리되다가 1913년 이후 호주 선교부에 이양되었다.
한편 1912년 이후부터는 한득룡 목사 부임으로 한국인 목사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2대 정덕생 목사 때 초량교회는 애국지사들에게 모임장소 및 여러 편의를 제공하고 상해 임시정부의 활동을 돕고 부산지역 3.1운동을 지원하는 등 애국운동의 전초기지가 되기도 하였다. 당시 부산지역 3.1운동의 중심인물인 윤현진 선생이 바로 초량교회의 집사였다. 초량교회 제3대 주기철 목사는 1925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초량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처음으로 주일학교를 조직하고 삼일유치원을 개원하는 등 교육활동에 힘썼다. 그는 항상 열정적으로 교회를 섬기고 성도를 찾았는데 그 결과 부임 전 200명이 채 안 되던 교회가 그가 시무하던 6년 동안 성인만 400여 명에 달하는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
주기철 목사는 초량교회 담임목사 시절 ‘신사참배거부안’을 경남노회에 제출해 정식 가결을 받아냄으로써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1931년 6월, 주기철 목사는 초량교회를 사임하고 마산교회(문창교회)로 떠났는데, 이는 목회자 사면 이후 교회 내 분란이 심해져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던 문창교회를 위해 그가 나서줄 것을 노회 원로들이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기철목사는 평양산정현교회의 청빙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신사참배반대운동을 펼치다가 옥사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절정이던 1938년부터 일제는 한국교회를 대상으로 야만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나섰다. 결국 그들의 위협과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각 교단 총회에서 이를 수락하는 결의가 잇따르고, 각 노회에서도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었다. 1942년 태평양전쟁을 전후해서는 교회탄압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초량교회는 주기철 목사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전 교인이 수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으며,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저항세력의 모임 장소로도 이용되는 등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감당했다. 그들은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산 속에(현 대청공원 충혼탑 아래쪽) ‘산리기도소’를 만들고 평일에도 숨어서 나라를 위해 눈물의 기도를 하였다.
▲1893 초량교회 초창기예배장소
한국전쟁(6.25) 당시에는 몰려드는 피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유치원을 휴원 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초량교회는 부산으로 피난 온 많은 교역자들과 기독교인들의 기도처가 되었다. 이처럼 초량교회는 일제강점기와 6·25 한국전쟁 등 고난의 때마다 우리 민족의 기도처이자 피난처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그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민족의 아픔과 크고 작은 시련을 겪으며 고난당하는 민족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으며 부산의 어머니 교회의 몫을 다하고 있다. 또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설립된 사회복지법인 <빛과소금복지재단>을 통해서 지역의 독거노인과 어린이교육 등, 지역사회 복지사역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며 이웃을 섬기고 십자가의 사랑을 삶으로 실천하고 있다.
초량교회가 앞으로도 과거 역사속의 믿음의 선조들이 살았던 순교자의 삶을 기억하고 그에 부끄럽지 않은 솔선하는 믿음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 초량교회에는 사랑의 사도 순교자 주기철목사가 사용하던 강대상이 지금도 유물로 보존되어 내방하는 순례자들을 맞고 있다. 부산지역을 대변하는 듯,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어머니교회로서의 아름다운 몫을 잘 감당하며 그 숭고한 믿음의 뿌리 깊은 역사가 초량교회를 넘어 부산과 온 나라에 전파되기를 소망해 본다.
-주소: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1동 1005번지, 초량교회
- 글 : 진흥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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