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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41> “‘주는 기쁨이 받는 것보다 훨씬 크다.”고 말하는 세브란스

박경진 2016. 1. 6. 11:00

 

 

41.  “‘주는 기쁨이 받는 것보다 훨씬 크다.”고 말하는 세브란스

▲ 세브란스 (1838-1913)

 

 

1884년 미국 북장로회의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온 호러스 알렌(Horace N. Allen)은 고종의 총애를 받아 왕실부의 시의관(侍醫官)으로 일했다. 그가 고종에게 건의하여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廣惠院)을 설립했다. ‘광혜’는 ‘널리 은혜를 베푼다’라는 뜻으로, 일반 백성의 질병을 치료했다. 그런데 왕립병원인 광혜원은 개원 12일 만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계(啓)에 따라 제중원(濟衆院_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집)으로 개칭되었다. 

 

1887년 가을 알렌이 미국특파전권대사 박정양의 수행원으로서 미국으로 가게 되자 헤론(Heron J. H.)이 어의로서 제중원의 진료 업무를 전담하게 되었다. 헤론은 1883년 테네시의과대학 졸업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인재로 모교로부터 교수직을 제안 받았으나 조선을 위한 의료선교사가 되기 위해 이를 거절했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 의료선교사로 지원하여 조선으로 파송을 받았으나 일본에서 이수정을 만나 조선에 관하여 공부하다가 1885년 6월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그는 뛰어난 의술로 존경을 받았으나 5년 뒤인 1890년 7월 이질로 사망하였다.

 그 후임으로 캐나다에서 파견된 빅톤(Victon,C.C.)이 의료 업무를 맡았다. 빅톤은 성실한 사람이었으나 조정신료들과 갈등을 빚었고, 그로인해 제중원 운영이 2년간 힘겹게 유지되면서 사실상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이때 제중원을 맡아 새롭게 재탄생시킨 사람이 바로 에비슨(Avison, O. R.)이다. 그는 1860년 영국에서 태어나 1887년 캐나다로 이주했고, 토론토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수와 의사로 일했다. 그러던 중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온 언더우드가 에비슨의 초청으로 토론토대학 선교모임에서 조선선교에 대해 특강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마침내 에비슨은 1893년 7월 미국 북장로회 의료 선교사로 내한하게 되었다.
병원에 대한 조정의 간섭이 점점 심해지고, 병원을 주관하는 관리들의 부패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른 상황에서 빅톤으로부터 제중원을 이어 받은 에비슨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가장 먼저 조정 신료들과 6개월간의 마라톤협상을 벌였고, 결국 1894년 9월 왕립병원이었던 제중원 운영권을 미국 선교부로 이관시켰다. 이로부터 제중원은 온전한 사립 의료선교기관으로 재편되었고,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한편 에비슨은 고작 12.5평 크기의 한국식 건물에 의료시설도 미비한 제중원을 개조-개선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1899년 3월 말 안식년을 얻어 캐나다로 간 에비슨은 건축가인 친구에게 병원 설계도면을 기증받고, 병원 건립기금(약 1만 달러)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했다. 그러던 차에 1900년 4월 뉴욕에서 개최된 해외선교회의에서 “한국에서 활동중인 의사들이 모여 함께 일할 수 있는 병원을 만든다면 훨씬 효율적인 의료선교 사업이 이뤄질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였다. 당시 이 자리에 클리블랜드 출신의 부호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가 참석했는데, 그는 스탠다드 석유회사의 회계담당자이자 대주주로서 많은 돈을 벌었다. 그의 평소 철학은 “주는 기쁨이 받는 기쁨보다 훨씬 더 크다”라는 것이었는데, 그러한 신념에 따라 그는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세브란스는 에비슨의 연설이 끝나자 그를 찾아가 병원설립계획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믿음으로 이미 설계도까지 완성했다는 에비슨에게 깊이 감명 받은 세브란스는 예상 건축비용 1만 달러 전액을 내놓았고, 이후 건축과정에서 발생한 추가비용도 부담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904년 한국 최초의 현대식 종합병원이 남대문 밖 남산 기슭의 복숭아골 대지에 세워졌고, 1913년에는 한국 최초의 의과대학 건물이 완공되었다. 그리고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각각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의과대학>으로 명명하였다. 이후 세브란스 병원과 의과대학은 일제시대 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사를 거치며 대한민국 최고의 의료기관이자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성장해오다가 1957년에 연희대학교와 통합하여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사학인 오늘날의 연세대학교를 이루었다. 이렇게 오늘날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최고 수준의 병원인 <세브란스병원>은 한 의료선교사의 비전과 헌신적인 기독인 사업가의 헌금으로 시작되었다.
현재 원래의 건물들은 도시계획에 따라 모두 사라졌지만, 서울역 앞 세브란스빌딩과 연세대학교 의과대학부속 세브란스병원, 그리고 1910년 정신여학교에 기증한 정신여고 구 본관 건물인 세브란스관 등, '세브란스'는 여전히 고유명사로 남아있다. 그리고 세브란스 가(家)의 자선사업은 그 후손들을 통해 세브란스병원에서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세브란스병원에는 그 동안 ‘미국 북장로교회(PCUSA)’ 명의로 매년 후원금이 입금됐다. 병원측에서는 그것을 단순히 미국교회에서 보내오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개원 120년을 맞아 알아보니 세브란스의 아들인 존 세브란스(John L. Severance)가 만든 기금에서 보내온 것이었다고 한다.

 

 세브란스 병원을 설립함으로써 에비슨 선교사는 우리나라 현대 의학과 병원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그는 단순히 병원을 건립한 것을 넘어서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전도의 문을 활짝 넓히는 선교적 결실 역시 맺게 되었다. 또한 조선에 대하여 아는 것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브란스는 믿음 안에서 조선과 조선의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며 기꺼이 헌금했고, 그로부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주는 기쁨이 받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그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브란스가(家)와 세브란스병원 등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 글 :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