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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40>공식선교사로 최초 내한한 언더우드의 빛나는 업적

박경진 2016. 1. 6. 10:57

 

 40. 공식선교사로 최초 내한한 언더우드의 빛나는 업적

 

▲ 언더우드 선교사

 

 

미국에서 북 장로교단의 파송을 받고 최초로 조선 땅에 입국하게 된 선교사 언더우드(H.G. Underwood 1859∼1916, 한국명 원두우)는 역시 감리교회의 최초선교사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1885년 4월 5일 제물포항으로 첫 발을 들여 놓았다. 이미 일본에서 이수정을 만나 조선의 언어와 풍속을 배우고 어느 정도 익히고 왔지만, 그의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듣던 대로 ‘땅 끝 나라’에 어울리도록 질병과 가난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언더우드는 보게 되었다. 이 같은 모습은 그가 드린 기도에서도 확인하게 된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 뿐입니다…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을 믿나이다."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밝은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문 중에서-
하지만, 그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언더우드는 실망 보다는 오히려 더욱 열정을 다해 조선의 교육과 의료사업을 위하여 헌신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가장 먼저 서울로 올라와서 당시 광혜원 원장을 맡은 알렌 선교사를 방문하고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는 과학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선이 바뀌려면 먼저 청년들이 변해야 한다면서 청년들을 계몽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언더우드는 길거리를 배회하며 구걸로 연명하는 아이들을 불러 모으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들의 의식주를 해결해주고, 공부를 가르치기 위해 ‘예수교학당’(후 경신학교)을 열었다.

 내한 한지 1년쯤 되던 어느 날, 언더우드 선교사의 자택 앞에서 구걸하다가 언더우드에게 이끌려 예수교학당의 첫 번째 학생으로는 거지가 순간의 실수로 학생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김규식 박사이었고 훗날, 언더우드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1897년 버지니아 주 로녹대학교 에서 6년간 공부했는데, 대단히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함으로써 한국인의 우수성을 알리는 계기였다는 일화가 있다.


 언더우드는 한국 최초의 <영한사전> 과 <영선사전> (1890)을 출판하고, <그리스도신문> (1897)을 창간하고 예수성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를 창립했으며, 그는 1887년 2월 성경번역을 위한 위원회를 조직하고, 헤론, 스크랜톤, 게일 등의 도움을 얻어 1905년 신약성경을, 1910년 구약성경을 번역, 완료하였다. 이로서 1911년에 우리는 한국어로 된 성경을 갖게 되었다. 그는 조선의 교육, 문화 발전에 주춧돌을 세운 위대한 교육자이자 출판인이었다. 또한 1900년에는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하여 문서사역과 교육사역이 지속적으로 전해질 수 있도록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 한편 그는 1915년 조선기독대학을 설립하고, 비록 1년 뒤인 1916년 하늘의 부름을 받았지만, 그 대학이 1917년 연희전문학교로 발전함으로써 오늘날 최고의 민족사학으로 자리매김한 연세대학교의 시작이 되었다.

 

▲ 언더우드동산(연세대학교)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국선교30여 년간 교육자로서, 출판인으로서, 번역자로서, 목사로서, 선교사로서 열정적으로 일하다가 1916년 건강이 악화되어 미국으로 귀국하여 치료하다 그해 10월 57세로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하고 하늘로 돌아갔다. 그의 시신은 당초 미국 뉴저지주에 안장됐으나, 1999년 3세 원일한 박사가 2세인 부친(원한경)이 묻힌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으로 이장했으며, 자신도 같은 곳에 묻혔다. 이로써 언더우드 일가는 1세부터 3세까지 양화진에 안장됐다.

 

 연세대학교는 2001년 ‘언더우드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2003년 말 언더우드 2세가 1920년대부터 살던 옛집을 정비해 ‘언더우드기념관’으로 개관하였다. 그토록 기독교정신으로 세워진 연세대학교 사학재단은 오늘날에 와서 본래의 설립 정신과 이념이 훼손되어져, 오늘날 연세대학교를 위하여 기독교가 무엇을 기여하느냐고 말하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할 것이다.

▲ 언더우드가 기념관


 연세대 설립자이자 초창기 외국인 선교사로 1세대부터 4대(원한광)에 걸쳐 한국의 선교와 교육, 사회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언더우드 일가는 입국 119년 만에 지난 2004년 한국을 떠났다. 그러나 언더우드 일가가 한국 땅과 한국 사람에게 심은 위대한 신앙의 씨앗은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를 넘어 대한민국이 지난 100년간, 그리고 앞으로 100년을 변화하고 발전하는 근원적 힘이 되어갈 것이다.

 

- 주소 : 서울 종로구 신문로 1가 42 (새문안교회 담임목사 이수영)

- 글 :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