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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43>캐나다에 조선선교사 파송의 개척자-윌리엄 맥켄지

박경진 2016. 1. 6. 11:11

43. 캐나다에 조선선교사 파송의 개척지 - 윌리엄 맥켄지

▲ 윌리암 존 맥켄지

 

▲ 맥켄지 목사 소래교회 집                                                                          ▲ 맥켄지 목사 추도예배

 

캐나다 장로교의 조선선교는 윌리엄 맥켄지 (William  J.Mckenzie 1861-1895)로부터 시작되었다. 선교사들의 글을 통해서 조선에 관해 알게 된 맥켄지는 아직 선교의 손길이 닿지 않은 땅, 이방인들을 위한 해외선교에 비전을 품게 되었다. 특히 조선이란 작은 나라를 향한 마음이 간절했다. 이는 1884년 12월 성탄특집(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미국선교잡지에 "조선으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기사가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이수정'이 보낸 편지로, 자기는 조선으로부터 일본에 와서 성경을 번역하고 있으나 조선에는 선교사가 없어서 성경을 번역해도 전할 사람이 없으니 미국에서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애절하게 호소하는 것이었다. 젊은 신학도인 맥켄지는 그 기사에 대하여 도무지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이수정의 애절한 호소에 매료되어 조선선교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 그러다가 1891년 할리팍스 신학교를 졸업하고 캐나다장로교 선교부를 찾아갔다. 그러나 해외선교에 대한 많은 빚을 지고 있어서 조선선교는 불가하다는 대답을 들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켄지는 조선선교에 대한 열정이 식기는 커녕 더욱 불타 올랏다. 결국 자비량 선교를 결심하고 모금운동을 펼치기로 하였다. 그는 가난한 조선에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외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일가친지, 친구들, 그리고 여러 교회를 통해 선교비를 모금한 결과 1년 정도 생활할 수 있는 선교자금을 모아 혈혈단신 단독선교사로 출발하여 1893년 12월,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 맥켄지 목사 캐나다 생가

  그는 서울에 도착하여 선교사들과 함께 조선말을 배우며 선교지를 탐색하던 중, 황해도 장연의 소래(松川 솔내)를 자신의 사역지로 정하고 1894년 2월 3일 소래에 도착하였다. 맥켄지는 소래교회를 섬기며 조선사람들을 사귀면서 말을 배웠다. 그는 조선 사람과 같이 먹고 자며 한복을 입고 짚신을 신으며 밀짚모자를 쓰고 조선 사람들의 일터를 찾아 그들의 문화와 관습에 동화되기를 희망하며 우리 문화를 깊이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였다. 그렇게 현지인처럼 생활하다보니 빈대, 벼룩 모기를 물려서 때로는 팔 다리가 퉁퉁 붓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하눅 최초의 자생교회인 소래교회의 초대목사라는 자부심을 갖고 복음전도에 힘을 쏟았다. 그는 진정으로 조선인이 되어야 선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찾아와서 그의 몰골을 보고 깜작 놀래며 "당신은 조선 사람이 아니야! 서양 사람은 조선 사람처럼 풍토병의 면역력이 없어서 고기를 먹어야 살 수 있어! 라고 충고하는 통조림 등 서양음식을 보내 주었다. 그러나 맥켄지는 "지금껏 잘 견디었는데 이제와서 서양음식을 먹게 되면 더 이상 조선음식을 먹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 음식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한편,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맥켄지도 동학군의 공격을 받았다.그는 두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넘겼음에도 오히려 동학군의 요새를 찾아가 부상으로 피투성이가 된 동학군들을 치료해 주면서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었다. 이에 감동받은 동학군들은 맥케지가 있는 소래교회는 하얀 천에 붉은 십자가(旗)를 높이 달게 하고, 그 표식을 보는 모든동학군이 이를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결국 소래 마을은 그 지역에서 동학군의 침략을 받지 않은 유일한 피난곳이 되었으며 소래교회의 신자라는 것은 신변안전을 위한 보증수표나 다름이 없었다. 이로부터 소래교회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크게 부흥하여, 마침내 1895년 7월 예배당을 새로 신축하게 되었다. 이때 언더우드는 "미국에서 건축기금을 후원금으로 모아 주겠다"고 제안하였으나, 소래교회 성도들은 "우리 교회를 세우는데 다른 나라의 도움으로 세울 수는 없다" 며 거절했다. 그리고 교인들의 순수 노력으로 예배당을 짓게 되었다.이에 언더우드는 미국에서 석유램프 다섯 개를 가져다가 새 예배당에 선물했는데, 밤에도 그 붗빛이 얼마나 밝았던지 온 동리가 대낮같이 밝았다고 전한다.

 

▲ 맥켄지 목사 묘지

 

 맥켄지는 조선 사람들과 함께 삶을 공유했다. 이, 벼룩, 모기에 물려 고통 받으면서도 전도하고 지역주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데 자신의 삶을 바쳤다. 그러다 그는 무더운 여름 뜨거운 햇볕에서 모진 열병에 걸려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고, 1895년 7월 23일 주일날 그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한국에 온 지 2년이 못되는 삶, 날짜로 치면 고작 600여일, 그리고 소래교회를 섬기고 소래사람들과 사귀고 청일전쟁 중에도 굳건히 교회를 지키며 생활한지 약 20여 개월만의 일이었다.

 맥켄지의 일기장에는 이런 글이 남겨 있다. 소래교회 신자들에게 " 자신의 의복과 남은 돈 172달러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을 교회 부근에 묻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글의 말미에서 "나의 마음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평안하다. 예수님은 나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나 나의 몸은 고통이 너무 심해서 더는 글을 쓸 수가 없다. 그러나 죽임이 아니길바란다. 이는 조선을 위해서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조선 사람처럼 살았기 때문에 죽었다고 하지 않겠는가"라고 썼다.

 이처럼 캐나다의 풍요한 삶을 뒤로하고 오직 조선의 복음전파를 위해 이 땅에 와서 헌신적인 충성,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다가 희생의 제물이 된 맥켄지 소식이 캐나다에 전해졌고, 마침내 캐나다 장로교 로부에서는 "우리가 캑켄지를 지키지 못했다"고 후회 하면서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3명의 선교사들이 파송되어 한국선교를 시작했고,이후 많은 선교사들이 함경도와북간도지역으 담당하며 복음을 전파했는데, 해방전까지 조선에 파송된 선교사가 무려 184명이나 되었다.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4)함같이, 맥켄지는 자기 생명을 사랑하기보다는 고통 받는 이들의 친구가 되고자 조선선교에 헌신적으로 몸을 던져 희생했음을 볼 수 있다 .마침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이룩 하였다.

 


-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국내성지순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