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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42>보화를 발견한 농부의 심정으로 동대문교회를 세운 메리 스크랜튼

박경진 2016. 1. 6. 11:05

42.보화를 발견한 농부의 심정으로 동대문교회를 세운 메리 스크랜튼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마13: 44)

 

 

 

▲ 1910년 동대문 교회

 

▲ 2013년 동대문교회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는 한 사람을 기리는 두 개의 비석이 있다. 비석의 주인공은 메리 스크랜턴인데, 한 비석은 그녀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이 어머니의 사랑을 기리며 세웠고, 다른 하나는 1986년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직원 일동이 세운 것이다. 그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적혀 있다.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 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1886년 5월 31일 메리 F. 스크랜톤 여사가 이화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 창립 100주년을 맞아 그 뜻과 사랑 앞에 머리 숙이고 여기 비를 세우노라"

 

 메리 스크랜턴(1832-1909)은 1885년 6월 21일, 일본에 머물던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 장로교 헤론 선교사 부부 등과 같은 배를 타고 제물포항으로 입국했다. 그는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선교사와 함께 의료선교사로 파송되었는데, 그때 53세로 다른 이들 같으면 사역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갈 정도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한다는 선교열정과 사명감으로 조선에 발을 들여 놓았다.

당시 조선백성들은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가난과 전염병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특히 서울 사대문((四大門) 밖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빈민층도 아닌 버림받은 거지들일 뿐이었다. 메리 스크랜턴은 상상했던 이상으로 비참한 현실을 보면서 그들에게 의약, 교육, 복음, 음식을 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한 그녀의 결심은 결국 남대문 밖에 ‘시약소(施藥所)’를, 서대문 밖에는 ‘애오개’를, 그리고 동대문 밖에 ‘시약소’를 설립하게 되었다. 또한 이화학당을 설립하고, 이 기관을 통해 조선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여성교육과 선교에 앞장섰다.

 

 동대문교회는 메리 스크랜턴이 세운 이 시약소의 기도모임에서 비롯되었다.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받던 조선 백성들은 음식과 약을 그냥 나누어주고 심한 병도 치료해주는 시약소를 찾아왔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그러다가 1890년 이대동문병원의 전신인 ‘동대문부인진료소’에서 정규집회를 시작하면서 동대문교회가 시작되었다. 초대 담임목사는 메리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이었다. 그리고 미국인들이 소원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대한민국 땅에 묻히기를 바란다.” 는 유언을 남긴 H. B. 헐버트 선교사가 제2대, 한국 감리교회 역사에 찬란한 업적을 남긴 벙커 선교사가 제3대, 배재학당의 영어선생이었던 노병선 전도사가 제4대, 애국자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손정도 목사, 김종우, 변홍규, 조신일, 마경일, 오경린, 장기천 등 한국 감리교회의 기라성(綺羅星) 같은 인물들이 담임목회를 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가난한 이웃을 섬기며, 늘 더불어 사는 동대문교회의 정신을 한국 사회의 곳곳에 뿌리내리도록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한편 첫 번째 예배당은 볼드윈 채플로, 미국 선교부 총무인 볼드윈 부인의 기부금으로 지어졌다. 이 예배당은 ‘ㄱ’자형으로 1892년 완공되었고, 한국 감리교회사에서 최초로 예배실 내에서 남녀가 함께 예배를 드린 기록을 갖고 있다. 1910년 교인이 증가하면서 붉은 벽돌의 현대식 2층 건물로 신축되었다. 이때 벙커 선교사가 신축교회 기념으로 미국에서 제작한 대형 교회종을 선물했다.

 세 번째 예배당은 대지 2,590㎡, 건평 1,450㎡인 현재 건물로 1973년에 완공되었다. 동대문교회는 감리교단을 넘어 한국 개신교 역사의 소중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감리교회 역사의 근간을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보물 제1호로 지정한 동대문(興仁之門)을 아끼고 사랑한다. 그 웅장한 모습은 과거의 영광의 한 자락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감리교회의 역사적인 동대문교회는 서울시의 성곽복원에 밀려 오히려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다. 동대문교회가 멀리 경기도로 이전된다면 동대문교회는 물론 감리교회역사성도 심각하게 훼손되는 것이라 보이며 차라리 교회확장을 위해 옮기려 한다면 교인들의 힘으로 제2동대문교회를 세우는 것이 동대문교회의 역사성으로 봐도 자랑스러운 일 일 것이다.

 그런데 이 귀한 보물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공익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동대문교회를 옮기려고 한다. 또한 ‘부흥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동대문교회를 허물려고 한다. 하지만, 정말 ‘공익, 부흥, 발전’을 하는 방법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그것을 ‘보물’로 인식하고 그 자리에 두어야만 한다. 그것이 또한 메리 스크랜턴가(家)의 3대선교사로 출발했던 그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선교정신으로 이룩한 동대문교회 설립정신이다. 한국 감리교회의 근간인 동대문교회의 역사와 갖가지 사료들, 그리고 동대문교회 이름은 자랑스러운 보물로 후세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동대문(興仁之門)이 대한민국의 보물 제1호 이듯이 동대문교회도 뿌리 깊은 감리교회의 보물로 보존되어야 동대문교회를 설립한 선교정신에 부합 된다고 할 것이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종로6가 65번지 동대문교회

 


-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국내성지순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