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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39> 여수 애양원과 순교자 산돌 손양원 목사

박경진 2016. 1. 6. 10:49

 

 39.여수 애양원과 순교자 산돌 손양원 목사

 

 

한국기독교사에 등장하는 많은 순교자들의 삶과 사역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날 그 신앙을 이어받은 한국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준다. 예수의 이름으로 붙들려 자신의 재능과 재산을 가난한 한국 사람과 나누고, 결국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드린 그들의 이야기는 역사의 한 구석이 아니라 전 역사를 타고 오늘과 미래로 이어질 귀한 ‘보물’이다. 그중 일제치하와 한국전쟁 당시 가장 낮은 곳에서 소외된 병자들을 사랑으로 섬겼던 손양원 목사와 애양원이야기는 단연 백미라고 할 것이다.

▲ 삼부자 무덤

 

 벨 목사와 오웬 선교사는 1904년 2월 목포선교부에서 파송되어 그해 12월 25일 광주에서 성탄예배로부터 선교를 시작한다. 그러다가 1909년 4월 3일 오웬 선교사가 급성폐렴으로 생명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친구이었던 포사이드는 즉시 목포를 떠나 광주로 출발한다. 그는 배를 타고 영산강을 거슬러 나주까지 도착하여 다시 말을 타고 광주로 가던 중, 길가에 쓰러진 여자 한센병 환자를 발견한다. 그는 곧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녀를 말에 태워 광주로 향했다. 그가 도착한 때는 이미 오웬은 사망한 후였다. 포사이드는 광주제중원에서 ‘한센병자’ 치료를 하려다가 다른 환자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친다. 마침 윌슨 등의 선교사들이 사택을 건축하기 위해 벽돌을 굽던 가마터에서 그녀를 치료하며 복음을 전했다. 이때부터 한센인에 대한 치료와 보살핌이 시작 되었다. 1909년 윌슨은 인근에 작은 집을 짓고 한센병 환자 10여명을 치료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한국 최초로 광주한센병원의 시작이었다. 그러자 1925년까지 약 600여명의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들면서 지역주민들이 집단으로 항의를 하게 되었다. 마침내 1928년 정부가 마련해준 여수 율촌면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기부자의 이름을 따 ‘비더울프 나병원’(1928~1935)으로 불리던 한센병원은 1935년 공모를 통해 “애양원(양 키우는 사랑의 동산)”이라는 이름을 채택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출처: <애양원과 손양원목사>)

▲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

 

 1939년 애양원교회 전도사로 부임한 손양원(1902-1950) 목사는 애양원교회에서 11년 2개월간 목회하며 일제강점기의 고난을 겪었다. 그는 신사참배 거부로 감옥에서 지낸 6년을 제외하면 순교할 때까지 한 순간도 빠짐없이 한센병 환우들과 함께 교회를 지켰다. 손양원 목사는 중환자들이 모인 병실을 자주 찾아가 그들의 몸을 만지며 기도했고, 때로는 입으로 피고름을 빨아내기도 했다. 같은 지역에 사는 것조차 꺼려 쫓아내던 시절, 환부를 만지고 심지어 입으로 고름을 빨아낸다는 것은 사랑의 헌신이 아니고는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또한 손양원 목사는 이러한 신앙의 실천을 목사로서 뿐만 아니라 아버지로서도 이어갔다. 1948년 여순 반란사건 때 세상보다 귀한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을 잃는다. 어이없게도 예수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친구였던 안재선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는 사형수 안재선을 용서했다. “원수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말씀에 따라 용서하고 그를 두 아들 대신 양자를 삼았다. 그리고 손양원목사는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9가지의 감사조건을 들어 기도를 드렸는데, 참여한 이들에게는 큰 충격과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1.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을 나게 하시니 감사.
2.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서 이런 보배(한센인)를 주셨으니 감사.
3. 3남 3녀 중에서 가장 귀중한 장남과 차남을 바치게 하셨으니 감사.
4.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이 함께 순교했으니 감사.
5. 예수 믿고 자리에 누워 임종하는 것도 큰 복인데 전도하다가 총살 순교했으니 감사.
6. 미국가려고 준비하던 아들이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감사.
7.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니 감사.
8. 아들의 순교 열매로서 무수한 천국의 열매가 생길 것을 믿으며 감사.
9.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시니 감사.
(오, 주여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옵니다.)

 

▲ 애양원교회 전경

 

▲ 한센인환부의고름을 빨아내는 손양원목사

 

 손양원 목사 역시 그 2년 후 1950년 한국전쟁 중에 애양원교회를 지키다가 공산당의 총부리에 순교를 당함으로써 삼부자가 모두 예수이름으로 순교한 ‘순교자의 가정’이 되었다. 지금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에 가면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거룩한 삶을 살다가 영광스런 순교자 반열에 든 삼부자의 묘지가 순례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현재에는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과 유적공원이 조성되었고, 여수시는 <여수박람회>기간에 맞춰 손양원목사 순교지를 테마공원화 하였으며 박람회장까지 셔틀버스를 운행하여 순례 객들의 편의를 돕기도 하였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한 여인의 한센병 환자를 사랑으로 돌본 포사이드 선교사의 사랑이 한국 최초의 한센병원과 ‘애양원’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서로를 의심하며 증오하고 살인하던 전쟁 한가운데서 자신의 자식을 둘씩이나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아 고통 받는 이웃과 민족에게 소망을 불어넣은 ‘사랑의 성자 손양원’ 목사의 삶이야말로 애양원의 정신이다.

 

- 주소 : 전남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번지


- 글 :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