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호남 선교의 시초, 전주서문교회와 예수병원
언더우드(Underwood,Horace Horton1890~1951)선교사는 1885년에 한국 최초선교사로 내한 한 후 1891년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가 미국 각지를 돌며 한국선교사역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 마침 미국 테네시 주 내슈빌에서 열린 전국 신학교 해외선교연합회의 집회에서 언더우드는 미국 유학생인 윤치호와 함께 강연을 하였다.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사역 7년 간 겪은 수많은 한국 선교이야기를 실감나는 경험담으로 설명을 하였다. 문명에 소외된 한국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들으며 감동적인 눈물로 격려의 박수갈채가 터졌다. 더욱이 유학생 윤치호의 한국 풍속에 대한 재치 있고 실감나는 설명에서 폭소가 쏟아지기도 하였다.
▲ 전주서문교회
마침내 벅찬 감동으로 강의를 들은 신학생들 중에서 한국 선교사로 지망하는 이가 많았다. 그 가운데서 미국 남장로교회의 테이트와 그의 여동생 메티 테이트, 레이놀즈와 그의 아내 팻시 볼링, 전킨과 그의 아내 메리 레이번, 리니 데이비스(처녀 선교사)등 7명의 선교사들이었는데 그들은 1892년 7월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였다. 일행 중 리니 데이비스는 일본을 거치지 않고 1892년 10월 17일 제물포에 먼저 도착하였고 나머지 6명은 일본 요코하마를 경유하여 그해 11월 3일 제물포를 거처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제일먼저 어학 훈련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호남지방은 동학교도들의 거친 활동으로 민심이 흉흉했다. 언제 어디서 불상사가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선교사들은 먼저 한국인 조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레이놀즈 선교사의 어학 선생이면서 선교사들의 일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던 정해원(鄭海元)을 선발했다. 전주에 도착한 정해원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준비하러 온 사람임을 밝히며 부근의 냇가에 있는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민심을 살피는 일과 장터 전도를 하였다. 그는 주일이 되면 은송리 자기 집에서 그간 사귀어 온 사람들에게 복음의 도리를 전하고 예배드리며 전주에 처음으로 온 신자답게 행동을 했다. 1893년 6월 정해원 조사가 도착한 후 첫 예배를 드린 것이‘전주교회’(현 전주서문교회)의 시작이요 호남선교역사의 시작이었다. 그 후 1897년 7월 17일에는 레이놀즈 선교사가 전주로 내려와서 전도를 한 결과 마침내 복음을 받아드리고 세례 문답에 합격하여 세례를 받은 이가 김내윤, 김창국과 여자 강씨 임씨 김씨 등 6명이었는데 이들이 전주교회의 최초교인이 된 것이다.
▲ 전위렴 선교사와 주일학교
이로써‘전주교회’는 한국인 세례교인이 있는 교회로 정식으로 성립이 되었다. 8월 1일 주일에는 전주교회에서 처음으로 성찬 예식을 레이놀즈 목사의 집례로 거행되었다. 그런데 세례 문답에는 합격했으나 멀리 시골에 사는 관계로 7월 17일 세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전씨가 뒤늦게 세례를 받고 성찬식에도 참여했다. 또한 이날 세례식에서는 7월 17일 세례를 받은 바 있는 김씨가 두 살 되는 딸 보영(寶榮)이를 안고 와서 자신의 신앙 고백에 따라 유아 세례를 받음으로 그 아이가 전주에서 처음으로 유아 세례를 받은 교인이 되었다.
이 무렵 전주 선교부는 많이 발전하였으며, 1897년 9월 5일 주일에는 교회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주일예배 인도자 레이놀즈는 선교사들 중에 우리나라 말을 가장 잘 했고 유창한 말로 설교를 하고 있었다. 이 날 예배 후에는 감동을 받은 교인들이 자진해서 예배당 개수(改修)를 위해 특별 연보(헌금)를 작정했다. 그 후 9월 7일 화요일부터 해리슨선교사가 살면서 예배 처소로 쓰던 집을 예배당으로 전용할 수 있게 방을 넓히고 인원을 많이 수용하도록 개수하였다. 수리를 마친 9월 19일 주일에는 개수된 예배당에 모여서 기쁨으로 감사 예배를 드렸다. 이때부터 이 건물은 전주교회 예배당으로 불렸다. 이때 교인은 여자들 외에 남자가 20명가량이나 출석을 하였다.
▲ 전주예수병원
전주예수병원은 1898년 미국인 마티 잉골드가 전북 전주 성문 밖에서 진료하면서 시작이 되었고 1899년에 마침내 병원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이 병원은 세브란스 전신인 광혜원(1884)에 이어 국내에서 근대식 병원으로는 두 번째로, 호남지역에서는 최초로 세워지게 되었다. 이 병원 설립과 관련해 감동적인 사실은 이 병원이 미국 남장로교 여전도 회원들이 생일을 맞아 감사헌금을 모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 헌금이 가난하고 의료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던 ‘은자의 나라’ 한국에 보내지게 된 것이다. 지금도 1936년 건립한 초기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어 그 역사적 의미를 전하고 있다. 한편 현재의 예수병원을 바라볼 수 있는 언덕에는 선교사들의 묘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 곳에는 전킨 선교사와 린네 데이비스 해리슨, 데이비드 랜킨, 넬리 랜킨 선교사, 박영훈 장로(예수병원 신경외과장, 6.25때 월남) 등이 묻혀 있다.
글: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 (02-2230-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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