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근대문화의 발상지 배재학당과 아펜젤러선교사
▲ 아펜젤러 선교사
배재학당은 1885년 아펜젤러((H. G. Appenzeller1858~1902) 선교사가 세운 한국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이다. 아펜젤러선교사는 이 땅에 최초 선교사로 도착하면서 첫마디로 ‘오늘 죽음의 철창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시고 이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복된 삶과 자유를 허락하소서.’ 라고 기도하였다.
그는 서울 정동에 자리 잡으면서 이 백성들을 위하여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았다. 그러던 중 가난 속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조선 백성들을 살리는 길은 먼저 의식을 깨우치며 무지에서 해방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교육이었다. 당시의 조선사회는 한문을 진서, 한글을 언문이라고 하며 한글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한글은 여성들이나 쉽게 배우는 것이라고 천시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 뿐 아니라 교육의 기회가 양반자녀들에게 편중되어 있어 평민들에게는 교육의 기회조차 주어지기 어려운 사회구조임을 그는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펜젤러 선교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교육기관을 창설하게 되었는데, 1885년 8월에 한옥을 매입하여 4명의 학생으로 교육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인 1886년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학교명을 하사받았다. 이 말은 ‘유능한 인재를 기르는 학교’라는 뜻을 담고 있다. 배재학당은 남학생들만이 입학할 수 있었는데, 예비과정, 교양과정, 대학과정에서 영어, 중국고전, 서구의 과학과 문학 등을 공부하도록 하였다.
배재학당은 교육의 기반을 다지면서 한국 근대화의 주역인 이승만, 서재필, 윤치호, 주시경, 김소월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한편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안에 ‘협성회’ 라는 토론회를 조직하고 독립협회의 서재필, 윤치호 등을 강사로 세워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와 독립정신을 고취시킴은 물론 복음의 능력이 개인구원에 국한하지 않고 고난당하는 민족을 위해서 봉사하는 데까지 이르기를 원했다.
배재학당 동관은 아펜젤러가 세운 건물로서 1916년 유럽식 붉은 벽돌로 지어진 후, 1984년까지 배재고등학교의 교실로 사용되어 오다가, 배재중·고등학교가 강동구로, 배재대학교가 대전으로 각각 이전된 후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쳐 2008년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지상 3층 규모의 박물관은 124년의 역사를 지닌 배재학당에 관한 내용은 물론, 근대 문화의 발상지답게 다양한 역사자료와 배재와 정동을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근대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은 상설전시관, 기획전시관, 체험교실 및 세미나실 등을 갖추고 있다. 1층의 체험교실은 1930년 당시의 교실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낡은 칠판과 책걸상 등이 전시되어 근대교육의 변천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상설전시관에서는 고종의 하사품인 배재학당 현판과 120여 년 전 학생들이 사용했던 교과서 등을 볼 수 있으며, 또한 ‘최초근대학생회’였던 ‘협성회’와 이를 토대로 한 독립협회의 탄생과 만민공동회 개최과정을 담은 자료, 배재학당 출신인 김소월의 ‘진달래꽃’(1925) 초판본도 만날 수 있다. 기획전시관에는 선교사들의 눈에 비친 한국의 풍광과 가옥, 한국인의 일상이나 한국 여인에 대한 단상, 한국어 발전에 대한 집념, 배재학당 내의 우물을 외부인이 퍼가는 것을 막아달라는 아펜젤러 교장의 청원서, 감옥에 수감 중 이승만이 보내온 편지, 1948년 호놀룰루 지역 신문에 난 이승만 대통령 취임기사를 스크랩한 자료 등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 배재학당 박물관 순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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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시작으로 이화학당을 설립하는 등 학원선교를 비롯하여 성경을 번역하고 책을 발간하는 기틀을 마련하고 인쇄문화사업에 선구자적인 기초를 닦기도 했다. 그가 한 이와 같은 일들은 문명을 모르고 어둠에 잠겨있던 백성들에게 문명을 깨우치는 신교육문화의 길을 여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정동교회를 위하여 혼신의 힘을 바쳐 목회에 열중하였다.
▲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하지만 학교를 설립하고 서양식 병원을 세우는 등 생명을 살리는 복음사역을 위해 헌신 하던 중 내한한지 17년, 그의 나이 44세에 목포 성서연구회의 참석 차, 배를 타고 가던 중 군산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함으로 안타까운 생을 마감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오직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명령만을 따라 미국의 풍요로운 삶, 안전한 보금자리를 포기하고 이 땅에 건너온 그는 이와 같이 이 땅의 죽어가는 많은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희생의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함 같이 하나님께서는 감리교회를 이 땅에 전파하기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의 제물로 목숨까지 바치신 아펜젤러의 희생의 대가로 오늘날 6,000교회, 160만 성도라는 많은 열매를 맺게 해 주셨다. 감리교회 160만의 성도들은 아펜젤러 선교사의 염원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주소: 서울시 중구 정동 34-5 배재정동빌딩 동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글 :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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