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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21>화성의 수촌교회만세운동과 일본인의 만행

박경진 2016. 1. 5. 17:01

21. 화성의 수촌교회만세운동과 일본인의 만행

 

 

수촌교회는 1905년, 김응태목사(당시성도)의 주도로 정창하의 집에서 7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가 시작었다. 1907년에는 수촌리 큰말 초가 3칸을 매입하여 잘 개조하고 수리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 수촌교회 예배당 전경

 

 수촌교회(향토유적 제9호)에서 일어난 비극의 역사는 1919년 3·1운동 한 달 뒤인 4월이었다. 서울에서 벌어졌던 3.1만세운동이 벌어진 이후 전국적으로 벌어진 독립운동의 불화살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수촌리에서 벌어진 학살과 방화사건은 차마 입을 열어 말로 다 표현 할 수가 없다. 이는 제암리교회 방화 사건보다 먼저 일어났으며 화성일대에서 벌어진 참극의 서막이었다. 이 사건은 본래 수촌리가 속해있는 장안면과 우정면 지역 주민들이 벌인 독립만세 시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수촌리와 인근 석포리 사람들은 4월 초, 독립만세를 부르며 평소 주재소 순경들이 양민들을 학대하고 무자비하게 대하는데 대한 감정을 항거하기위해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향해 몰려갔던 것이다.

 

 갑자기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며 항거하기위해 달려드는 주민들을 향해 일본경찰이 무자비하게 총을 쏘아대다가 마침내 실탄이 떨어졌다. 그때 총알이 빗발치는 것을 피해서 도망치던 군중들이 때는 이때라고 만세소리를 외치며 다시 일본경찰이 총알이 떨어져서 도망치는 것을 보고 그들을 향해 진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와바다 순사부장과 필사적인 격투를 벌이던 중 흥분한 군중들이 가와바다를 잡아 내동댕이치며 발로 짓밟아 버렸다. 총을 쏘아대다가 총알이 떨어져서 당황하는 것을 보고 흥분한 군중들은 사정없이 짓눌러 마침내 실신한 것을 버리고 황급히 도망쳐 버렸다. 그는 결국 목숨을 잃었고 이로 인해 수촌리 일대에 일경의 가혹한 보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일본 순경들은 가와바다 일본 순사부장의 죽음을 보고 독이 오를 대로 올라서 범인을 색출하기위해 나섰는데 그들의 눈에 ‘수촌주민일동’이라고 적힌 플랫카드가 발견되었다. 독이 오른 일본 순사들이 무기를 들고 수촌리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경찰은 주동세력이 수촌리 주민들이라고 단정하며 수촌리에 집중적으로 보복행위를 감행하게 되었다. 일경들은 수촌리를 시위대의 진원지로 지목하고 계속해서 4차례에 걸쳐 가장 혹독하게 보복을 가하였다.

 

 1차 보복은 4월 5일 새벽 3시반경 수비대 30여 명을 이끌고 수촌리 큰말을 완전히 포위하고 총격을 가하며 수촌리 교회당과 가옥 24채에 불을 질러서 5명의 주민들이 부상을 당했다. 2차 보복은 이날 오후 어은리를 거쳐 발안으로 나오던 수비대가 수촌리에 들러 남은 8채의 가옥을 샅샅이 수색하던 중, 가와바다 순사부장이 짓밟혀 죽을 때 입었던 그 피 묻은 옷을 찾아내었다. 그 당시 주민들을 발안리 주재소로 끌고 가서 혹독하게 고문을 가하게 되었다. 4월 7일 일본 수비대는 3차 보복으로 수촌리 가장 말을 비롯하여 꽃말, 용담 골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협박하여 발안리 주재소로 끌고 가 밧줄에 묶어 몽둥이질을 하였다. 이날 끌려온 주민들은 무려130여 명에 달하였다. 4월 8일 전개된 4차 보복에서 수비대는 수촌리로 몰려와 만세시위를 주도한 백낙렬을 찾는데 혈안이 되었으나 주민들의 호응이 없자, 나머지 가옥 4채에 다시 불을 질렀다. 이 방화로 수촌리는 전체 40여 가옥 중 36채가 불타는 참사를 겪게 된 것이다.

 

 수촌교회가 바로 이 난리 통에 불에 타버렸는데, 신앙이 돈독하던 김의태성도는 자기 집이 불길에 휩싸여 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황급히 우선 자기교회로 달려갔다. 불속에서 교회의 중요문서인 교적부(생명록)와 당회록 등이 들어있는 50k 이상 되는 무거운 궤짝을, 혼자서 밖으로 들어내었다. 이렇게 화재에서 건져진 수촌교회의 소중한 유물은 한국기독교 역사에도 기념비적인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편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된 건물은 본래 8칸의 초가 예배당으로 사용해 오다가 1932년 1월 수촌리로 다시 이전하였고 1987년에 초가형태의 옛 수촌교회 형태로 복원되었고 이 복원된 역사자료관에 화재속에서 건진 유물들을 보존하고 있다. 한편 그 옆에는 1965년 건립된 현대식 벽돌건물이 자리 잡고 있어서 수촌교회의 역사와 화성 제암리교회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이처럼 수촌교회와 제암교회 등이 자리한 경기도 화성 일대는 일제만행에 맞서던 민족 저항운동의 생생한 현장이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라는 제암리 순국기념관의 표어는 관용의 마음과 더불어 생명을 불어넣고 사랑을 전해야 할 교회가 힘을 잃어가는 이 시대에 교회의 정체성을 잃지 말고 역할과 사명을 다하자는 거룩한 외침으로 다가온다고 할 것이다.

 

 

-주소 :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수촌리 674 (수촌교회)

 


- 글 : 진흥홀리투어,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