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연동교회 게일 목사와 천민출신 고찬익 장로
▲ 연동교회초대장로 고찬익 ▲ 은퇴시의 게일선교사
연동교회 제1대 장로 고찬익(高燦益1857~1908)은 본래 평안남도 안주(安州) 천민태생이다. 그가 성장하면서 거리를 휘젓고 다니던 건달, 술주정뱅이, 난봉꾼이었는데 관가에 끌려가 매 맞고 벙어리 되었다가,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었다. 연동교회 게일 목사는 “내게 노벨상 추천권한이 있다면 고찬익을 추천하겠다.”고 까지 하였다.
제임스 게일(James Scarth Gale, 한국명 奇一, 1863-1937) 선교사는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기독청년회의 파송으로 1888년 6월 내한하였다. 그리고 1891년 8월 미국 북 장로교회 선교사로 소속을 바꾸고 1892년 6월 원산에서 같은 소속의 소안론(蘇安論 : W. L. Swallen) 선교사와 함께 봉수대에 ‘예수집’이라는 선교구를 개설하고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원산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을 몰아내려고 ‘예수집’에 돌을 던져 문을 부수며 “예수 도깨비 나오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선교사들은 조선 백성들의 영혼구원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해 선교사역에 매진했다.
원산에서 열정을 다하여 선교사역에 매진하던 게일은 한 술주정뱅이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고찬익이다. 가죽으로 신발을 만드는 천민 갖바치였던 고찬익은 30세 전후 젊은 시절에 노름꾼, 사기꾼, 술꾼, 주정뱅이로 방탕하게 생활하다가 관가에 끌려가 수없이 매를 맞다가 벙어리가 되었으며 빚 독촉에 시달리다 자신의 신분을 비관해 음독자살을 시도했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게일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게일 선교사로부터 「네 이름은 무엇이냐?」라는 야곱에 대한 내용의 전도지를 받았던 그날 잠을 자다가 꿈에서 흰 옷 입은 사람이 나타나 “네 이름이 무엇이냐?” 라고 하였다. 고찬익은 너무 무섭고 떨려서 말을 못하며 “내 이름은 고가올시다. 싸움꾼이고 술꾼이고 망나니올시다. 누구신지 모르지만 저를 용서해 주시고 살려만 주십시오.”하고 울어버렸다. 그 사람이 다시 “이제부터 너는 내 아들이다.”하고 사라졌다.
꿈이 하도 이상해서 정신을 차리고 전도지를 또다시 읽을 때 갑자기 혀가 풀리고 말을 하기 시작했으며 그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밤중에 돌을 던졌던 봉수대로 게일 선교사를 찾아간 고찬익은 꿈에서 한 노인이 나타난 일과 자신이 벙어리였는데 말을 하게 된 것을 고백하며 게일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당시 최하위 천민에게는 마땅한 이름이 필요 없었지만 게일 선교사는 앞으로 남에게 유익이 되는 삶을 살라는 뜻으로 그에게 찬익(贊翼)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후에 고찬익은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원산에서 게일 목사의 선교사역을 돕고자 혼신의 힘을 다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1899년 9월 그는 게일 선교사를 따라 원산에서 서울로 오게 된다. 1900년 연동교회 초대 당회장이 된 게일은 열심 있는 고찬익을 조사로 임명하였다. 그는 전도를 사명으로 삼고 종로 5가의 갖바치들을 전도하여 연동교회로 끌어들였다. 그의 전도로 연동교회는 매주 새 신자가 몰려들었고, 그에 따라 교인수도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 1904년 연동교회 당회가 조직될 때 고찬익 조사는 연동교회 제1대 장로로 선출되었다. 연못골 일대의 천민들은 자신들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고찬익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갖고 그를 따라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편 고찬익은 천민 갖바치들에게만 전도한 것이 아니라 양반 대감들에게도 전도하여 성공을 하게 된다. 고찬익은 평안북도 관찰사를 지낸 박승봉 대감에게 전도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고위직 양반을 천민신분의 사람이 만나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고심 끝에 그에게서 한문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접근을 시도했다. 그로부터 매일 한문성경을 들고 가서 마태복음서의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박승봉 대감은 문자는 가르치면서도 그 의미는 가르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거꾸로 그 의미는 고찬익이 설명해 주면서 공부를 하였는데 2개월 만에 박승봉 대감이 연동교회에 한 번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강단 위에서 설교를 하는 이가 다름 아닌 자신에게 한문 공부를 배우던 고찬익이 아닌가! 깜짝 놀란 그는 고찬익의 간증설교에 크게 감동을 받고 두 손을 모아 정중히 인사까지 하였다. 그 후 박대감은 그 옆의 안동교회로 나가게 되었고 후에 그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 연동교회전경
고찬익 장로는 불구자나 노동자는 물론 양반대감 등 귀족들에게 전도하고 설교하는 데 명수였다. 한 번은 지체 장애자 서넛이 모여 사는 빈민굴에 가서 전도를 하고, 불편한 몸으로 교회에 나올 수 없는 그들을 매주일 찾아가서 한 사람씩 등에 업어 주일예배에 출석을 시켰다. 그리고 황성YMCA 회장인 이상재와 총무 김정식, 그리고 협판을 지낸 이원긍과 유성준, 개성 군수를 역임한 홍재기 등 양반 귀족들도 천민출신 고찬익 장로의 간증설교를 듣고 모두 감탄하면서 복음을 받아드렸다.
“교회 지도자는 사회적 신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양반이나 상민과 천민의 구별이 없다.”고 말한 게일 목사는 고찬익 장로를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신학교에 들어간 고찬익은 공부에 열중하면서도 여전히 거리에서 전도하는 일에도 열정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는 목사가 되고자 하는 꿈을 갖고 헌신적으로 전도활동을 하던 중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1908년 식중독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게일 선교사는 고찬익 장로를 자신이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꼽았다. 그래서 자신에게 노벨상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반드시 조선의 고찬익을 추천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초기 한국교회는 민족 앞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잘 감당해 왔다. 또한 민족의 유일한 희망이기도 했다. 이런 선교역사를 생각할 때 오늘날 한국교회가 세상의 빛이요 희망이 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은 과연 진정한 변화의 삶을 살고 있는지를 자성하며 무거운 책임감을 갖게 된다.
- 글: 진흥홀리투어 대표/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 (02-2230-5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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