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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67> 상동교회-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와 전덕기 목사

박경진 2016. 2. 19. 10:12

67. 상동교회-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와 전덕기 목사


▲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은 54세이던 1885년 6월 의사인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1856∼1922)목사 등 3대가족을 이끌고 미 감리회 해외여선교회 파송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이듬 해 메리 스크랜턴은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이화여고·이화여대의 전신)을 세우는 등, 그 후에도 20여 년간 여성교육과 선교에 헌신하면서 애오개의 아현교회와 동대문 옆의 시약소로부터 발전한 동대문교회가 세워졌다. 한편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은 민중선교에 힘썼는데, 배재학당을 세웠던 아펜젤러나 제중원의 알렌선교사 등이 지도자층을 길러내는 ‘엘리트선교’를 표방한 것과는 달리 그는 소외계층을 위한 의료혜택에 집중했다.

1886년 6월 현재 정동제일교회 자리에 ‘미국인 의사병원’이라는 간판을 걸고 진료를 시작하였는데 3년 후인 1889년 남대문 쪽에 있는 복숭아밭을 매입하여 그곳으로 옮겨, 병원교회로 시작했던 것을 상동교회로 이름하고 초대 담임목사로 윌리엄 스크랜턴이 취임했다. 윌리엄 스크랜턴이 상동교회를 세웠다면, 그 초기부터 상동교회를 성장, 발전시킨 것은 바로 전덕기(1875~1914) 목사이다.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숯장사를 하던 숙부 밑에서 어린 시절을 살았다. 17세 때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를 만나서 심부름꾼으로 시작한 그는 스크랜턴 선교사의 조사(助事)로 선교사역에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곧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신학공부를 하면서 1902년 전도사가 되었다.


▲ 상동교회 초기 모습


1907년에는 감리교 집사목사 안수를 받아 윌리엄 스크랜턴의 뒤를 이어 상동교회의 제6대 한국인 담임목사가 되었다. 어렵게 성장한 전덕기 목사는 스크랜턴의 민중목회에 감화를 받아 평생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을 위한 목회를 실천하면서 자부심으로 열정을 쏟았다. 항상 사람들로 북적이던 남대문시장 사람들을 대상으로 노방전도에 힘썼으며, 연고자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장례를 치러주는 등 궂은일이라면 서슴지 않고 끊임없이 민중들의 친구로 사는 목회자였다.

전덕기 목사는 근대 민족운동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교회 안에 ‘상동청년회’ ‘공옥학교’ 등을 설립했고 이 학교를 본거지로 이시영·김구·주시경 등 독립운동가 들을 결집하여 ‘상동파’를 결성하였다. 1907년에 도산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를 결성했던 그는 전도사 시절 을사보호조약 반대상소를 올린데 이어 헤이그밀사 파견을 논의했다. 민족계몽운동과 애국운동을 벌였으며 그런 일로부터 그는 일경에 연행되어 심한 고문을 당한 후, 자리에 누워있는 상태에서도 교회를 개척하는데 힘을 쏟았다.


전덕기목사는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어 온갖 고문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옥중에서 석방된 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면서 목회사역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다가 1914년 옥중 고문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한 채 끝내, 할 일 많은 세상에서 그는 아까운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장례는 남대문시장의 상인은 물론, 기생과 걸인들까지 통곡하며 상여꾼을 자청했고 그의 장례인파가 10리 밖까지 이어졌으며, 그의 주검은 경기도 고양 땅에 묻혔다. 그가 떠난 뒤에도 상동교회의 민족운동은 계속되었다. 그의 흔적을 지우려는 일제의 강요로 그의 유해는 1934년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다. 이로 인해 그의 위패만 동작동 국립묘지에 모셔져 있다. 한편 전덕기목사의 영향은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중 최석모 오화영 이필주 신석구목사 등 4명이나 상동교회 출신으로 기록되고 있다.

한편 1944년 일본의 모진 압박 속에 상동교회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45년 일제의 패망과 광복의 세상이 열렸으나, 다시 1950년 민족상잔의 쓰라림을 겪던 격동의 세월 속에서도 흩어졌던 교인들이 하나, 둘, 모이며 상동교회가 재건하게 되었다. 1959년 23대 박설봉 목사가 담임을 맡으면서 교회재건에 박차를 가하여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였다. 남대문시장을 중심으로 1976년 성도들의 노력으로 지금의 성전을 준공했다. 이듬해 학원선교와 사회봉사를 목표로 새로나백화점을 개설하였다. 1973년에 인수했던 삼일재단(삼일중, 삼일실업고교)을 1977년에는 서울신학교(후, 협성대학교)를 설립하면서 활발한 교육 사업을 펼쳤을 뿐 아니라 현재까지 16개의 지교회를 설립하는 등,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1998년 IMF를 전후로 새로나백화점이 문을 닫게 된 후 건물은 교회와 일반 상가로만 사용하면서 오늘의 상동교회를 이루고 있다.


▲ 상동교회 전경

민중계층을 주요 선교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그들이 자립과 독립의 기반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민중선교’의 전통을 수립한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 그리고 스크랜턴 선교사가 표방했던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해방을!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고통 받는 자에게 평안을!’라는 복음의 내용과 캐치프레이즈를 이어 하나님과 민족을 사랑했던 전덕기 목사, 그들은 진정 지금의 상동교회를 일구는데 초석을 놓았다. 현재 125년의 역사를 지닌 상동교회는 독립운동의 산실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건물 수익사업을 통해 학교를 세우고 기독인재를 양성하는 등, 교육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남대문 상인들의 친구 이었던 상동교회가 이천 년 전의 예수, 그리고 100여 년 전의 전덕기목사의 뒤를 이어 앞으로도 민족교회와 민중목회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이어나갈 것이라 기대된다.


-주소: 서울시 중구 남창동 1번지 (담임 서 철 목사)

 

-글 :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