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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68.> 일자형(一字形) 한옥 자천교회와 권헌중 장로

박경진 2016. 2. 19. 10:57

68. 일자형(一字形) 한옥 자천교회와 권헌중 장로

한국기독교 130여년의 역사 가운데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일제 강점기 온갖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킨 이들이 많았다.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의 탄압에 맞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목숨까지 잃은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또한 해방 후 발발한 한국전쟁의 참혹한 현장에서 공산당과 맞서서 목숨을 잃은 이들 역시 헤아릴 수가 없다.


이러한 아픈 역사 속에서 100여년이 넘는 세월 그 터전을 지키며 성도들의 마음의 고향이 되고 또 다시 일어설 근간이 되어준 교회들이 있다. 경북 영천에 위치한 자천교회, 역시 그러한 교회 가운데 하나다. 한옥건물 자천교회는 1898년 10월 아담스(E. Adams 1867~1929, 한국명 :안의와)선교사에 의해 세워졌다. 1891년 2월 2일 가족과 함께 내한한 미국 북장로교 베어드(W. M. Baird 1862~1931, 배위량)선교사가 부산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했는데 1895년 11월 대구선교기지 개설허가를 받은 후 처남 아담스 선교사에게 대구선교 업무를 맡기었다. 아담스 선교사는 영천과 청송을 오가며 선교활동을 하다가 1898년 노귀재(해발530m)에서 당시 경주고을의 서당 훈장이었던 권헌중을 만나 복음을 전했다. 그것이 열매를 맺어 권헌중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므로 자천교회 시작의 계기가 되었다.


1898년 10월 자천리에 정착한 권헌중은 초가를 구입해 예배당 겸 서당으로 사용하며, 지속적으로 안의와 선교사와 왕래하면서 믿음을 키웠다. 그는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도 앞장서 상투를 자르고, 노비문서를 불태워 자신의 집 노비들에게 자유를 주는 등 서양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마침내 신분과 계급타파에 앞장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한편, 자천교회 신자가 점점 늘어나게 되니 공간이 협소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899년 4월에는 아담스 선교사의 권유로 예배당 건립을 추진하려고 했으나 일제의 반대와 오랜 유교문화의 관습에 젖은 지역주민들의 심한 반대로 예배당 건축이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하면서 중단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권헌중은 낙심하지 않고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자천리의 주재소와 신촌 면사무소건물을 새롭게 건축해 주는 조건으로 교회건축 허가를 받아내었다. 마침내 1904년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는 자천교회의 목조건물인 ‘일자(一字)형’ 기와집예배당을 건립하였다. 또한 훈장이었던 권헌중은 1913년 경, 이전에 운영하던 서당을 중단하고 자천교회를 중심으로 근대문화 교육시스템인 2년제 신성소학교를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50여 명의 남학생만을 모집하여 교육하였으나, 이후에는 여자반도 함께 모집하여 신문화 교육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1922년 권헌중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제8회 경북노회에서 자천교회 초대장로로 장립되었다. 자천교회의 실질설립자인 권헌중장로는 장로로 장립되기 전인 1920년에도 교회 채무를 갚기 위해서 자신의 전답 2두락(마지기 약 300평)을 팔아 헌금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헌신하며 자천교회 기초를 튼튼히 하는 데 핵심역할을 하였다. 한편 일제가 무기를 만들기 위해 쇠붙이를 수탈해 가면서 교회종을 빼앗겼으나, 해방을 맞은 다음, 1948년에 새로운 종탑을 세웠다.


▲ 자천교회 전경

자천교회는 영천지역의 초대교회로 발전 해오다가 1953년 상송교회(화북면 상송리)와, 1974년 입석교회(화북면 입석리)를 세워 분립하였다. 1979년에는 교회당 신축을 위해 애쓰던 중 갈등이 생겨 지금의 화북교회(화북면 자천리)로 교회가 각각 분리되어 나가면서 오랫동안 신앙적인 갈등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자천교회는 2001년 부임한 신점균 목사의 노력으로 2003년에 일자형 한옥건물의 독특한 보존가치를 인정받고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제452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나무와 기와로 지어진 건물이 오랜 세월 보수가 되지 않아서 지붕, 벽, 기둥 등이 많이 손상되고 장마철마다 비가 새는 등 문제가 많았는데, 2005년 경상북도와 영천시로부터 2억 4,000만원의 지원금으로 문화재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쳐 복원공사를 단행하여 2006년 4월 1일 준공감사예배를 드렸다.

 

이처럼 자천교회는 아담스 선교사(안의와)가 노고재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권헌중을 통하여 옥토에서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유교문화의 전수자와 다름없는 서당훈장이었던 권헌중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자신의 이전의 삶과 재산과 명예를 모두 분토와 같이 여기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로부터 자천교회는 신분의 귀천과 남녀를 무론하고 모여 기도하고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때문에 일제강점기와 6·25라는 국란(國亂)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작고 보잘 것 없는 예배당을 지키며, 신앙의 후진들에게 든든한 초석이 되어주었다.

비록 대단한 순교의 미담이 전해지지 않아서 비교적 늦게 세상에 알려졌지만, 1950∼60년대 이미 주일학교 학생이 100여명이 넘었으며 신성소학교를 통해 지역의 인재들을 양성해온 자천교회의 역사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다음세대를 위한 좋은 모델이 될 것이다. 때문에 자천교회 설립자, 권헌중 장로를 비롯한 자천교회 역사이야기가 알려져서 우리세대와 다음세대에 훌륭한 신앙의 모범으로 전승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주소 : 경북 영천군 화북면 자천3리 773번지 자천교회 (담임 손산문 목사)

사진 -글 : 진흥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