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양화진에 잠든 한국고아의 아버지-소다 가이찌 부부이야기
▲ 양화진. 소다 가이치 선교사 기념비(좌)와 묘비(우)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양화진외국인묘지’에는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많은 선교사들과 가족들이 묻혀있다. 그중 유일한 일본인 가족이 있는데, 바로 소다 가이찌(曾田 嘉伊智, 1867-1962)와 그의 부인 우에노 다끼(上野, 1878-1950)이다.
소다 가이찌는 1867년 10월 20일 일본 남서부 야마구찌 현(山口 縣)에서 태어났다. 21세 때 고향을 떠나 일찍 개항된 나가사키로 가서 탄광에서 일하며 초등교사 자격증을 얻어 교사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25세 때 노르웨이 국적 화물선의 선원이 되어 홍콩에 가서 영어를 익혔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대만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29세에 대만으로 가서 독일인이 경영하는 공장에 취직하여 일했다. 그러던 1899년 어느 날, 술에 취해 길에 쓰러져 죽을 뻔 한 그를 한 조선인 청년이 근처 여관에 데려다 주고 여관비까지 지불해 주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조선인 청년에게 고마움을 느낀 그는 은인의 나라를 찾아 1905년 한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 YMCA의 전신) 학관에서 일본어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 우에노 다끼 여사
그는 거기서 종교부 총무 월남 이상재를 만나고 그에게 깊은 감화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삶의 전환점이 된 것은 그의 아내 우에노 다끼(上野, 1878-1950)와 결혼하면서 부터다. 당시 우에노는 일본인 초등학교 히노데 소학교(일신초등학교의 전신) 교사이면서 동시에 숙명여고와 이화여고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소다는 아내를 만나면서 술을 끊고 전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는 YMCA 일본어 교사직을 그만두고 일본인 경성감리교회 전도사가 되어 매서인을 겸하며 복음전도에 투신했다.
소다는 직접 독립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늘 조선인들의 친구이자 변호인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1907년에 헤이그 밀사사건, 1909년에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 1910년에 한일합방, 1912년에 105인 사건이 줄줄이 일어나면서 일제는 1910년부터 무단정치를 실시했다. 강화된 일제의 폭압으로 YMCA의 인물들을 포함한 한국인 지도자들이 연일 시련을 겪을 때마다 그는 한국인의 편에서 말하고 행동했다. 특히 105인 사건이 당시 그는 이 사건을 조작한 데라우찌 총독과 일본인 경성기독교회(해방 후 덕수교회) 장로인 와다나베 대법원장을 찾아가 “죄 없는 조선 사람을 즉시 석방하라”고 항의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러한 행동으로 소다는 일본인 사회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조선인으로부터는 스파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으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변함없이 조선인과 조선교회를 사랑했다.
▲ 소다 가이치
한편 1921년 소다 가이찌 부부는 고아사업기관인 일본 가마구라(鎌倉) 본부로부터 경성지부 책임자로 임명받았다. 이들은 가마구라보육원(현 영락보린원)에서 조선인 고아들과 함께 생활하며 정성껏 돌보아 "소다는 하늘의 할아버지, 우에노 다끼는 하늘의 어머니"라는 칭송을 들었다. 심지어 고아원이 경제난으로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을 때, "소다 선생 내외분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업입니다. 우리나라 동포를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라는 익명의 편지와 거금 1천 원이 마당에 놓여있었다고 한다. 또 어느 날은, 일본헌병대가 고아들에게 항일교육을 했다며 소다를 체포했는데, 이유인즉 그가 돌본 고아가 독립투사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그는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43년 원산의 일본인 교회에 교역자가 없다는 소식을 들은 소다 전도사는 7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무보수인데도 원산으로 떠났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서울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는 부인과 떨어져 원산에서 자취하며 목회하였다. 그 후 조선은 해방을 맞게 되고 1947년 소다는 일본으로 귀국하여 "오 하나님, 일본이 범한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다녔다. 부인 우에노 여사는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서울에 남아 있다가 1950년 1월 74세로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소다는 부인의 죽음에 대해 "그녀는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봉사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아니 그의 영혼은 늙은 남편과 같이 여행하면서 힘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는 나대신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한국사회사업연합회 주관으로 거행된 부인의 장례식 후 소다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계속해서 일본인 회개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늘 한국으로 가고 싶어 하는 그의 사정을 알게 된 일본 아사히신문사와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의 주선으로 1961년 내한하여 영락보린원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62년 3월28일 95세의 나이로 한국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사회단체연합회장으로 2천여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의사당에서 거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일본인에게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이처럼 소다 가이찌를 서울 YMCA 교사로, 원산교회 전도사로, 가마구라보육원장으로 40년간을 한국에서 살며 수천 명의 고아들의 아버지가 되게 한 사람은 술 취한 그를 선대한 한 무명의 조선인 청년이었다. 그가 행한 작은 ‘선행’이 한국을 위해 눈물 흘리는 일본 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눈물이 수많은 고아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였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주소: 서울 용산구 후암동 370 <영락보린원>
사진 - 글: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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