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목사 오다 나라찌(전영복)
▲ 오다 나라찌(전영복) 목사
▲ 오다 나라찌 목사 부부
일본은 멀고도 가까운 이웃이다. 한국에 복음이 들어오기까지는 더더욱 그랬다. 1882년 9월 28일 조선의 선비 이수정은 신사유람단 2진인 박영효의 비수행원으로 일본을 가게 된다. 그런 그가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쯔다 박사인데 그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1884년에는 루미스의 도움으로 마가복음을 최초로 번역하게 까지 된다. 일본사람들이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겠다고 할 때 이수정은 이를 반대하고 1884년 미국에 조선선교사 요청의 편지를 두 번씩이나 보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의 신학생들이 여기저기에서 반응을 일으켜 한국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한국복음화를 위해 일평생을 바치며 헌신한 일본인 선교사들도 있다. 오다 나라찌(織田楢次, 1908-1980 한국명: 전영복) 목사도 그 중의 하나다. 오다 목사는 1908년 1월 18일, 일본 효고현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불교 주지로, 재산을 다 털어서 절을 세울 정도로 불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오다는 장차 절간을 그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부친의 바람대로 스님이 되려고 수련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였지만 불도를 닦으면서 점차 자신감이 없어지고 회의를 느끼다가 결국 17세에 절간을 뛰쳐나오고 만다. 고베 시내를 방황하던 그는 노방 전도대의 뒤를 따라가게 되었다. 고베에 있던 그리스도교회 까지 따라간 오다는 그곳에서 당시 유명했던 호리우찌 목사의 설교 말씀에 감동을 받고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그 후 호리우찌 목사의 권유로 간사이(關西) 성서학사에 입학했다. 거기서 한 한국인 유학생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자기 아버지는 3·1만세운동 때 일본헌병들에게 총살당했다는 말과 함께, 한일합방, 민비시해사건, 고종독살사건, 관동대지진조선인학살사건 등 일본의 침략과 일본제국의 한국에 대한 죄상을 낱낱이 폭로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서 오다는 큰 충격을 받았다. 마침내 그는 일본인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한국에 선교사로 나가 일본인이 한국에 대하여 지은 죄에 대해 사죄하면서 한국인을 위해 자기생명을 바치기로 결심을 하였다. 21세가 되던 해인 1928년 그는 고베항에서 목포로 가는 화물선에 몸을 싣고 무작정 떠났다. 한국말을 듣는 것도 표현 하는 것도 서툴렀지만 그는 오직 사죄의 일념만 가지고 드디어 같은 해 4월 24일 목포항에 도착하였다.
일본인 전도자로서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한국말을 배우면서 노방 전도를 하였다. 주로 벽촌지역을 찾아다니며 전도했지만 일본인이 한국말을 더듬거리며 하는 말을 잘 들어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명을 가지고 출발한 오다는 힘들고 어려운 고비마다 눈물의 기도로 극복하면서 때로는 일본경찰들에게 한국인 학대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 후 오다는 일본을 오가며 한국에 대해 더 배우고 익히면서 한국인으로 살고자 애썼다. 한국인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이름도 한국식으로 바꾸었다. 성(田)은 오다(織田)에서 따오고, 이름은 ‘영원’을 뜻하는 영(永)과 후쿠오카(福岡)에 있다고 해서 복(福)자를 사용하여 전영복(田永福)이라 지었다. 田자의 성씨는 입 구(口) 안에 십자가(十)가 들어있어 입으로 십자가, 즉 영원한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서의 그의 다짐을 나타내고 있었다.
▲ 함석헌선생과 함께
한편 일본은 1933년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1938년 장로회 총회의 신사결의를 앞두고 일본 기독교대회 대회장 도미다 목사는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신사참배는 종교행위가 아니라 국민의례다.’ ‘이를 거부하면 비국민으로 규탄 받는다.’고 선전하였다. 그런데 1937년 평양 기독교회 대표자들은 오다 목사를 초청하여 평양 숭실전문학교 강당에서 강연회를 열었다. 이 강연에서 그는 “여러분! 도미다 목사는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속지 마십시오.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입니다. 이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지 말라’는 십계명의 첫째와 둘째 계명을 어기는 죄악입니다.” 라고 역설했다. 숭실대 학생들과 의식 있는 목사들은 그의 말에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이 일로 오다 목사는 평양경찰서로 끌려가 강연내용을 모두 쓴 후 평양경찰서장의 교시를 받고 풀려났으나, 곧 일본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오다 목사는 일본에서 1941년 일본신학교(현 동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미가와시마 한인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일본에서도 그는 한국인에 대해 빚진 심정을 갖고 이후 줄곧 한국인 교회에서만 목회했다. 조선 선교도 중요하지만 재일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으로 재일대한기독교회를 재건하는 일에 적극 참여하는 양심 있는 일본인이었다.
오다 목사는 일본이 한국에 입힌 상처를 일본 교회가 감싸주도록 함으로 재일한국인과 일본인이 화해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1970년 22년간의 교토(京都) 한인교회 사역에서 은퇴하고 재일대한기독교 전도국의 간사로 있으면서 일본의 미약한 교포교회를 돌보았다. 교역자가 없는 교회에서는 설교를 하기도 하고 교포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는 교회개척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처럼 오다 목사는 일평생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전도자였다. 우리나라 정부가 5.16 민족상을 수여하려고 했으나, 그는 “내가 세상에서 상을 받으면 하나님 나라에 가서 받을 상이 없습니다.”라며 거절했다. 오다 나라찌 목사는 1980년 9월 27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나그네와 같던 재일동포를 사랑하며 진정으로 한국인을 섬겼던 선한 목자로서의 일본인이었다.
글 :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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