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 오웬 선교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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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웬은 초기에 목포, 광주에서 의료와 선교를 병행하다가, 병원에서 자유로운 복음전파가 가능하게 되자 유진 벨과 함께 전도 사업에 전념하게 된다. 광주, 해남, 완도, 보성, 나주, 고흥, 화순, 광양 지방을 순회하며 복음전도를 통하여 광주 송정리교회(1901), 해남 선두교회(1902), 광주 양림교회(1904) 등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밖에 전남 각 지역을 순회하며 프레스톤(J.F. Preston), 맥컬리(H.D. McCallie), 코잇(R.T. Coit) 등과 여러 교회를 순회하며 설교했다. 한 달 이상을 집을 비우는 일이 허다하여, 그의 어린 딸이 “아빠는 왜 집에 계시지 않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의료와 선교를 병행하다 보니 과로가 겹치고, 기후나 풍토에 적응해 가는 중에 몸이 쇠약해져 치료차 일시 미국으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얼마 후에 다시 돌아온 그는 1904년 12월에 유진 벨 목사 가정과 함께 광주로 이사해 광주선교부를 개설하였다.
당시 목포항 개항으로 광주에도 변화의 급물살이 일고 있었는데, 이때 일본인들은 친일파 관료들의 도움으로 입지가 좋은 서문 밖에 정착한 반면에, 미국 선교사들은 서문 밖 광주천 너머 양림동에 서양촌을 형성하며 1905년 읍성 북문 안쪽에 ‘북문안교회’를 세우고 숭일학교와 수피아여고를 건립해 근대교육의 기틀을 다졌다. 수피아여고 뒷동산에 위치한 오웬 선교사 집 주변에는 당시 양림천의 거지들과 문둥병 환자들이 장사진을 쳤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오웬을 ‘오 목사(吳 牧師)’라 불렀고, 그의 묘비에도 ‘님’이라는 존칭 없이 ‘吳牧師’라고만 새겨져 있다. 이처럼 그는 인생의 황금기에 조선에 와 친숙하고 가깝게 다가서며 예수의 좋은 친구로 이 땅 사람들의 좋은 친구로 섬기다가 마흔 두 해 짧은 삶을 남기고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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