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 캐나다의 조선선교사 파송의 개척자 | ||||||||||||||||||||||||
윌리암 매켄지 | ||||||||||||||||||||||||
| ||||||||||||||||||||||||
선교사들의 글을 통해서 조선에 대하여 알게 된 매켄지는 1891년 할리팍스 신학교를 졸업한 후, 아직 선교의 손길이 닿지 않은 땅, 이방인들을 위한 해외선교에 비전을 품게 되었다. 특히 “조선으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는 음성을 가슴에 품고 조선선교의 꿈을 키운다. 하지만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는 당시 해외선교에 대한 많은 빚을 지고 있어, 의욕은 있으나 조선선교는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매켄지는 조선선교에 대한 열정을 지울 수가 없어서 직접 모금운동을 펼쳤다. 무지와 가난과 풍토병으로 죽어가며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미지의 땅 끝 나라 조선에 대해 알리며 자비량 선교비 모금운동을 펼친 결과, 1년 정도 생활할 수 있는 선교자금을 모았다. 그리고 마침내 캐나다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혈혈단신 1893년 12월12일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매켄지는 조선 사람들이 입는 것, 먹는 것, 자는 것을 함께 하면서 이, 벼룩, 빈대, 모기에 물려가면서도 전도활동에 힘썼다. 그러다가 그는 무더운 여름 무서운 열병에 걸려 못 견디고 쓰러져 1895년 7월 23일 주일날 그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매켄지는 죽기 전 소래교회 신자들에게 자신의 의복과 남은 돈 172달러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을 교회 부근에 묻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남긴 글에서 “나의 마음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평안하다. 예수님은 나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나 나의 몸은 고통이 심해서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다. 그러나 죽음이 아니길 바란다. 그것은 조선을 위하여서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조선 사람들처럼 똑같이 살아서 그렇게 죽었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라고 적고 있다.
그렇게 매켄지는 조선선교를 위하여, 소래교회를 위하여, 격무에 쫒기며 극심한 과로에 지치고 무리한 햇빛의 노출과 음식물로 인한 영양결핍 등, 풍토적 차이로 고생하다가 젊음을 불살라 이 땅에 뼈를 묻었다. 한국에 온 지 겨우 1년 반, 날짜로 치면 고작 559일, 그리고 소래에서 생활한지 313일, 약 10개월만의 일이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함 같이, 매켄지는 자기 생명을 사랑하기보다는 고통 받는 이들의 친구가 되고자 조선 선교에 희생했음을 볼 수 있다. | ||||||||||||||||||||||||
'한국기독교역사 (신문 연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43. 오웬 선교사 (0) | 2010.03.22 |
---|---|
42. ‘선한 사마리아인’-포사이드 선교사 (0) | 2010.03.22 |
40. 4대에 걸친 린튼 가(家)의 한국사랑 (0) | 2010.03.22 |
39. 한국 최초의 현대식 병원 - 제중원 (0) | 2010.03.22 |
38. '지라도'의 섬- 소록도 (0) | 2010.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