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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85> 순교자 임광호 전도사와 하리교회의 순교신앙

박경진 2016. 8. 18. 10:17

85. 순교자 임광호 전도사와 하리교회의 순교신앙

 황해도 신천군에서 출생한 임광호 전도사(1923-1950)는 만주 길림성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독실한 신앙인이었는데 해방을 맞고도 북한에서는 바른 신앙의 길을 걸을 수 없음을 깨닫고 사선을 넘어 월남했다. 1948년 3월 4일 전북 완주군 와리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여 3-4명에 불과하던 교회를 200여 명으로 부흥시켰다. 그의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사역으로 지역에서 와리교회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자 와리지방에 기생하던 공산당은 교회 일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도가 점점 더해서 임광호 전도사가 아예 그곳에서 목회를 못하도록 조직적인 방해 공작을 펼치기에 이르렀다. 결국 임광호 전도사는 이들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와리교회를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임광호 전도사(1923-1950)


하지만, 그럼에도 임광호 전도사는 사역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인 1950년 4월 16일, 임광호 전도사는 와리장로교회의 집사였던 백한나, 전경순, 유정례 씨와 함께 백한나 씨의 마른 논바닥에 천막을 치고 하리성결교회를 개척하였다. 임광호 전도사는 동네에서 아픈 사람이 생기면 어디든지 찾아가서 성심껏 기도하며 돌봐주었다. 논과 밭으로 나가 전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같은 열정에 감동받은 마을 청년들과 주민들이 그를 신뢰하고 따랐으며 교회도 점차 부흥하였다. 이를 지켜 본 공산당들은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겨 감시하고 기회만 있으면 끌고 가서 온갖 말로 회유하거나 협박을 일삼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광호 전도사는 굴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6월 초순에 와리와 하리 중간지역에 건평 20여 평짜리의 예배당을 건축하는 착공감사예배를 드렸다.


▲하리교회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했다. 하리교회에서는 전쟁 통에 공산당의 핍박이 거세질 것을 예상하여 임전도사에게 가족을 데리고 피난하도록 간곡히 권했다. 그러나 임광호전도사는 “목자가 양떼를 버리고 어디를 가느냐!”고 펄쩍 뛰며 거절했다. 8.15해방 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한에 가족을 두고 단신으로 자유를 찾아 월남한 임광호 전도사에게 교회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렇게 임전도사는 피난을 가지 않고 교회를 지키며 예배당 건축을 계속 진행했다.

그러던 1950년 7월 10일, “잠깐이면 된다.”는 공산당의 말에 임광호 전도사는 런링옷 차림으로 끌려갔다.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자 새색시 김복순 사모는 수소문하고 찾아 나섰고, 결국 삼례국민학교 치안대의 독방에 갇혀 있는 그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임전도사는 “걱정하지 마라. 곧 나가게 될 거다.”라며 사모를 위로하고 또한 남은 성도들의 안부를 일일이 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젊은 사모와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교회건축 중지와 신앙의 포기를 강요하는 고문이 열흘 동안 계속되었고, 악에 받힌 공산당원들은 “이 놈은 총알도 아까우니 몽둥이와 괭이로 때려 죽여야 한다.”며 1950년 7월 20일 저녁 6시경, 임전도사를 포함한 몇 사람을 삼례읍 월산리 바위 밑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 임광호 전도사 등은 악랄한 공산당의 매질에 결국 순교자가 되고 말았다. 함께 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백한나 집사 등에 따르면 임전도사는 감옥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으며, “예수만 안 믿는다고 하면 당장 살려준다.”는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도리어 “당신들도 예수 믿어야 산다.”며 전도했다고 한다.



▲임광호 전도사 순교기념비


신앙으로 교회를 지키려다가 27세의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임광호 전도사는 당시 결혼한 지 4개월도 안된 신혼부부이었다. 그 후 김복순 사모는 혼자 3년간 교회를 지키며 당시 유복자였던 아들을 믿음으로 잘 성장시켰다. 그가 곧 은행동교회 임창희 목사이다.

그 후 하리교회는 교단의 분열과 교역자의 잦은 변동, 가난한 재정 등으로 온갖 고초를 겪었다. 그러다가 삼례교회의 도움으로 건축위원회를 조직하고 1962년 4월 2일부터 4일까지 전주성결교회 이대준 목사를 강사로 초청해 부흥회를 열었다. 이 부흥회 기간 모인 헌금 157,000원으로 총 건평 29평의 예배당 건축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공사비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하리교회 성도들은 교회부흥과 예배당 건축을 위해 헌신하다가 순교하셨기에 그 신앙을 본받아 자신의 일인 듯이 모두 성전건축을 위해 기도하며 백방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중에 대표적으로 문형우 집사는 자신의 눈을 빼어 팔아서라도 성전건축을 완공해야겠다고 결심하고는 아무도 모르게 전주 예수병원을 찾아가 눈을 팔겠다고 애원하면서 세 번씩이나 병원을 찾아가 사정을 했지만, 사연을 들은 병원에서는 그때마다 멀쩡한 눈을 뺄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이러한 하리교회 교인들의 눈물어린 헌신의 사연을 듣게 된 마두원(D.R. Malsbary, 미국) 선교사가 이 사실을 기고문의 형식으로 작성하여 미국 기독교계 신문에 보냈다. 그리고 이 기사를 읽은 미국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하여 99,700원의 헌금을 보내주었다. 이렇게 모인 총119,774원의 헌금으로 성전의 외부 공사를 마무리 하면서 예배당으로 사용할 수가 있었다. 문형우 집사를 비롯한 하리교회 교인들의 간절한 소망과 눈물어린 기도와 헌신을 하나님께서 외면하지 않으시고 놀라운 축복으로 응답해 주신 것이다. 그 후 신실한 믿음 열정적인 기도, 투철한 사명감으로 교회를 건축하는데 기여한 문형우 집사는 결국 목회자의 길을 걷는 사명 자가 되었고 아들 문사무엘 목사(기성 전주지방, 아름다운교회)도 아버지의 신앙을 이어받아 하나님께 헌신하고 있다.

이처럼 희생과 헌신, 그리고 거룩한 순교신앙의 터 위에 세워진 하리교회는 “가라 아니면 보내라.”는 선교 표어 아래 오늘도 선교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다. 한편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사업회는 임광호 전도사의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의 영정사진을 한국기독교 순교자기념관에 모시고 돌로 순교기념비를 세워 순례자들에게 큰 감동과 교훈을 전하고 있다.

 

- 주소 :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하리 250번지 하리교회

 

- 글 : 진흥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