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신사참배 거부한 선비목사 - 봉경 이원영 목사
경북 안동은 율곡과 함께 한국 유학의 양대 기둥으로 존경 받은 퇴계 이황의 고향이며 동시에 유학의 산실인 도산서원이 있는 곳이다. 워낙 뿌리 깊은 유교문화에 불교세가 더해지면서 외세에 대해, 특히 서양문화와 기독교에 대한 배타성이 다른 지역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안동에 처음 선교사가 들어간 것은 1893년이지만 1908년에야 비로소 안동읍에 교회가 설립된 것도 이러한 배타적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이렇게 폐쇄적이기만 했던 안동이지만, 1919년의 3.1운동을 기점으로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확 변화하게 되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안동읍교회 에서도 목사와 교인들이 안동읍 장날 만세시위를 주도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옥고를 치렀다. 이를 계기로 ‘서양 오랑캐의 종교’로 배척하기만 하던 안동 주민들이 기독교를 보는 관점이 바뀌었고, 유학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양반’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봉경(鳳卿) 이원영(1886~1958) 목사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봉경 이원영 목사(1886~1958)
이원영은 1886년 7월 3일 안동군 도산면 원촌동에서 퇴계의 14대손으로 태어났다. 정통 유교 가정에서 출생한 탓에 4살 때부터 한문공부를 시작했고 봉성측량강습소와 보문의숙을 졸업하였다. 1919년 삼일운동을 맞아 유생들이 주동이 된 예안읍 장날(3월17일)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므로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간이나 복역하였다. 옥고를 치르는 동안 많은 기독교 애국자들과 접하게 되었고, 특히 안동읍 장날시위를 주도한 동향 출신 이상동 장로로부터 전도를 받아 35세에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출옥 후 1921년 1월 8일 세례를 받은 후 섬촌교회(剡村敎會)를 설립하였다. 정통 유림의 정신적 지주인 퇴계의 후손으로서 예수교인이 된 것도 마뜩찮은데다가 도산서원이 내려다보이는 섬촌(剡村)에 교회당을 짓는다고 하자 문중에서는 족보에서 제명하겠다고 위협했다. 핍박 속에서도 그는 교회를 설립하였는데, 문중의 어른들이 몇 번이나 도끼를 들고 와 교회기둥을 찍고 파손시켰다. 1925년 그는 안동성경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30년에는 평양신학교를 졸업(25회)하고 영주중앙교회 강도사로 시무하다가 그해 12월 경안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32년부터 40년 넘게 안기교회(현 안동서부교회)를 담임하였다. 1933년에는 제24회 경안 노회장으로 피선되었다.
한편 일제는 1938년 2월 9일, 교세가 가장 강하던 평북노회에서 강제로 신사참배를 가결시켰고, 그해 8월 31일에는 전국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시인하는 결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반대하는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백여 개의 교회와 미션스쿨은 문을 닫았다. 1939년 5월 31일 이원영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죄목으로 안동경찰서에 피검되었고, 혹독한 고문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자 일본경찰은 그를 석방하였다. 이후에도 해방되기까지 4차례에 걸쳐 투옥되었으나 오히려 수감기간 중에 70여명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이원영 목사 기념비
그는 또한 일제강점기말 신사참배와 황민화정책을 반대하다 체포되어 경산경찰서에서 해방을 맞았으며, 해방 후 경안고등성경학원을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경안고등성경학원은 성경중심 신학교육과 목회실천을 강조하였지만 성경공부와 생활실천의 조화를 강조했던 것은 퇴계학풍의 서당식 교육을 접목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1954년 4월 23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9대 총회장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 이듬해부터 과로와 노쇠, 일제의 옥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3년간 투병생활을 하다가 1958년 6월 21일 73세의 일기로 소천 하였다.
그가 마지막까지 목사로서 소임을 다했던 안동서부교회에는 <이원영 목사 기념비>가 서 있다. 기념비에는 ‘훌륭한 가문, 고귀한 명성, 영광스러운 성직, 실로 값진 것을 한 몸에 지닌 자랑스럽던 한 인물의 생애. 그는 일제강점기의 폭정 아래 수없이 투옥을 당하며 오로지 나라를 사랑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걸어가셨다. 그 독실한 믿음, 고결한 인격, 온유 겸손한 성품. 충성된 나라님의 종 늘 우러러 존경합니다.’ 라고 적혀있다.
평생 안동 밖을 나가본 적이 없었던 퇴계처럼 안동 밖으로 나간 적이 없던 양반 출신 목회자 이원영 목사는 학문과 실천, 신앙과 목회에서 유학과 기독교를 아름답게 조화시켰던 선비 목사였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고 온 교회들이 지난 잘못을 회개하도록 총회를 이끌었으며, 어떠한 위협과 핍박 속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이원영 목사는, 마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묻혀 썩으므로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유교가 강한 안동지역에서 기독교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자신을 드려 헌신한 것은 한 알의 밀알로 기억될 것이다.
사진 -글 : 진흥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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