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여명을 밝힌 숭실학당(숭실대) 설립자 베어드 선교사
▲베어드 선교사
베어드(W.M. Baird, 1862~1931 한국명: 배위량)는 미국 인디아나 주에서 출생했다. 1885년 하노버 대학, 1888년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원래 중국선교사로 갈 예정이었으나 북장로교 선교부의 요청에 따라 베어드는 아내와 함께 1891년 1월29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틀 후 제물포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2월3일 서울에서 개최된 북장로교회 선교사 연례회의에서 부산지부 선교사로 공식 임명되었다. 북장로교는 부산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일본인 거주지 밖에 있는, 영선현의 땅을 매입했고, 베어드는 1891년 9월 부산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베어드의 사랑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는 초량교회(구. 영선현교회)의 모태가 되었다. 또한 한국인 최초 신자였던 서상륜과 그의 동생 서경조, 황해도 장연사람 고학윤 등, 초기 전도자들의 도움을 받아 경상도 지방과 전주, 목포 등 전라도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하였다.
▲1901년경 숭실학당
배위량 선교사는 1895년까지 4년간 부산에서 일하다가 대구로 옮겨 제일교회와 계성학당(계명대)을 설립하는 큰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1896년에 서울지역 교육담당목사로 발령을 받았다. 얼마 후 다시 평양으로 사역지를 옮긴 배위량은 사재(私財)를 들여 1897년 10월 10일 자택 사랑방에서 13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숭실학당(현, 숭실대학교)을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숭실학당은 1900년에 중등교육기관으로 발전했으며, 1905년에는 대학부 설치를 대한제국의 정부로부터 인가받음으로써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적 종합대학교가 되었다. 학교의 운영은 미국 장로교선교부와 감리교선교부가 합동으로 하기로 결의하였으나, 감리교선교부는 1914년까지만 함께 했고, 나머지 선교부들은 1938년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될 때까지 계속 운영에 참여했다.
평양 숭실대학은 일제강점기 을사보호조약 반대운동, 3.1 만세운동, 105인 사건, 광주학생운동, 그리고 신사참배 거부운동 등, 당시 민족운동이 발생할 때마다 중심지로서 역할을 다했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 방방곡곡에 교회를 세우는 전도대를 조직하여 활동했으며, 1910년에는 학생들이 학비를 아끼고 절약하여 손정도를 중국 선교사로 파송하는 등 민족복음화운동의 기초를 닦는 데 최선을 다했다.
한편, 해방 후, 5년 만에 한국전쟁으로 학교뿐만 아니라 온 나라가 초토화 되면서 평양에서는 학교를 재건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종전 후 1954년 4월에서야 비로소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의 상도동에서 다시 학교의 문을 열게 되었다. 이때부터 한경직, 박형룡, 강신명 목사 등 한국교회의 기둥과 같은 분들을 배출하면서 명문대학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한경직기념관(좌)과 한국기독교박물관(우)
본래 숭실학당은 설립자 배위량 교장의 엄격한 학칙 준수와 철저한 기독교 교육으로 정평이 났었다. 성경공부와 주일예배는 엄격한 규율 아래 철저히 지켜졌으므로 출석부에 반드시 도장을 찍어 예배 참석자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자치, 자력, 자전(자력 전도)의 이른바,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한국 실정에 맞게 교육에 적용시켰다. 육체노동을 천시하고, 앉아서 글만 읽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던 뿌리 깊은 한국 전통의 훈학제도와 의식을 개혁하기 위해 학생들의 학자금 제도와 자립정신을 제1의 교육목적으로 삼았다.
설립자 배위량 선교사는 1916년 숭실대 학장을 사임한 후, 이땅에 기독교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문서선교 사역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노력은 성서번역 및 기독교문서 출판을 통한 근대 출판문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토대가 되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준 배위량은 선교사로, 한학자로, 교육자로 헌신하다가 1931년 11월 29일 전염병인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향년 69세를 일기로 평양에서 소천 했다. 유해는 평양 숭실학교 구내에 안장되었다. 양화진에는 그의 가족들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비문에는 “베어드는 부산과 대구를 개척한 선교사, 우리를 사랑하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배위량 선교사 부부는 개화기 한국에서 두 자녀를 풍토병으로 잃었다. 부인 안애리(Annie L.A. Baird, 1864~1916) 선교사는 미국에서 암치료를 받다가 남편의 사역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투병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이처럼 배위량 선교사 부부는 복음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와서 열악한 환경과 싸우며 희생하기까지 이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특별히 우리가 일제강점기로, 인하여 미래가 안 보일 때 교육을 통해 우수한 인재들을 길러내었고 독립운동을 비롯하여 근대국가의 기본 틀을 다질 수 있게 하였다. 이땅에 와서 젊음과 생명을 다 바치고 자녀들의 목숨을 거룩한 제물로 바치기까지 희생한 그들은 죽어서도 이땅에 뼈를 묻었으며 묘비만이 그의 삶을 증거하고 있다. 이들의 삶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곳에서 예배하는 삶이 가장 영광스러운 삶임을 우리들에게 일깨운다.
-주소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511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 글 : 진흥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
'감리교뉴스 한국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교회사86>한국 최연소 성인 유대철과 아버지 유진길의 순교 (0) | 2016.09.21 |
---|---|
<한국교회사85> 순교자 임광호 전도사와 하리교회의 순교신앙 (0) | 2016.08.18 |
<한국교회사83>하나님의 열혈군사-순교자 박관준 장로 (0) | 2016.07.18 |
<한국교회사82> 신사참배 거부한 선비목사 - 봉경 이원영 목사 (0) | 2016.07.18 |
<한국교회사81> 제주도 출신 1호목사 순교자 이도종의 이야기 (0) | 2016.0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