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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81> 제주도 출신 1호목사 순교자 이도종의 이야기

박경진 2016. 7. 15. 17:08

81. 제주도 출신 1호목사 순교자 이도종의 이야기

 

 오늘날 세계적인 관광지이자 대한민국의 평화를 상징하는 섬으로 각광받는 제주도이지만, 과거에는 외딴 유배지였고 대한민국이 갓 태동한 시기에는 무장공비에 의해 4.3사태를 겪는 등 슬픈 역사를 적잖이 간직한 곳 역시 제주도이다. 그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제주도 출신으로 첫 목사가 되어 제주도에서 목회를 하다가 제주도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된 이도종 목사이다.

 

 


이도종 목사는 1892년 9월 13일 북제주군 애월읍 금성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했던 그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익히면서 주변의 기대와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19세가 된 어느 날 그의 운명을 바꾼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제주도에 첫 선교사로 부임하여 첫 교회를 세운 이기풍 목사였다. 그는 한때 평양거리를 주름잡던 폭력배 두목이었던 그는 자신을 변화시킨 복음을 들고 전도자로서 열정적으로 선교에 앞장섰다. 하지만, 가뜩이나 외지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극도로 경계하던 당시의 제주도민이 서양종교를 전하는 이기풍 목사를 환영할 리가 없었다.

그는 문전박대를 당하고 몰매를 맞기도 했지만 13년간의 제주도 사역기간 동안 최초 교회인 성내교회를 비롯하여 삼양, 내도, 금성 등 15곳에 교회를 세웠다. 이도종은 이러한 이기풍 목사의 열정적인 목회활동에 감화를 받아 예수를 영접했다. 이도종은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에 가서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전도하여 얻은 첫 열매였다. 마침내 이도종은 이기풍 목사의 따뜻한 사랑과 권유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26년 34세 나이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이도종은 불타는 사명감으로 전북 김제의 농촌지역에서 목회자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 그는 1928년 김제중앙교회를 설립하였으며 목사 안수를 받았다.


▲평양신학교 졸업 무렵의 이도종 목사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 일본은 기독교가 황국신민화 정책에 지장을 준다고 판단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예배를 방해하고 있었다. 김제중앙교회 담임목사인 이도종이 일본에 대하여 남다른 견해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되자 일제는 그를 주요 감시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지역 유지의 결혼식에서 축사를 하던 중, 당시 시국과 관련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갔다. 이 사건 이후 그는 교회를 사임하고 제주행을 결심하게 된다.

고향 제주도 출신 첫 목회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복음의 불모지인 제주도를 은혜의 땅으로 만들자’는 다짐을 하면서 1929년 고향 제주도로 돌아왔다. 그는 제주도에서 서귀포교회, 중문교회 등 10여개 교회를 개척하며 제주지역 농어촌을 중심으로 활발한 전도활동을 펼쳤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던 그의 선교사역은 어이없게도 해방공간에서 멈추고 말았다. 1948년 4월 3일부터 7년 7개월 동안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로 주민 3만 여명이 희생되는 최악의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이 바로 ‘제주도 4.3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교회들도 큰 피해를 입었는데, 당시 토벌대의 중심을 이룬 ‘서북청년단’ 등이 외지인들인 데다 기독교인들이 많아서 무장대들이 교회를 상대로 복수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도종 목사는 고산교회 담임으로 있으며, 화순교회, 대정교회 등을 순회하며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난리 속에서도 주변의 만류와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교회들을 오가며 예배드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전쟁을 방불케 할 만큼 사태가 심화되던 1948년 6월, 이도종 목사는 자전거에 성경책을 싣고 화순교회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떠났다. 산을 넘는 도중에 갑자기 무장대들이 나타나 총구를 겨누었다. 그리고 산속으로 끌려가 “양놈의 사상을 전파하는 예수쟁이”, “미 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혐의로 취조를 받았다. “예수교가 그렇게 좋다면 공산인민이 이 싸움에서 이기도록 기도 좀 해주시겠습니까?”하는 조롱 섞인 질문에 그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도 않고 죄 없는 양민을 죽이는 무신론집단의 승리를 위해 기도할 수 없소.”


▲대정교회 전경


마침내 그는 다른 10여명과 함께 두들겨 맞으며 구덩이에 던져져 파묻혀져서 생매장상태로 순교자가 되었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이도종 목사는 계속 찬송을 부르며 “주여 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하는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결국 제주4.3사태는 이도종 목사를 비롯해서 11개 교회 16명의 성도가 무장대에 의해 피살되었고 서귀포교회, 협재교회, 조수교회 등, 불에 타 소실된 곳이 다섯 교회나 되었다.

 

그의 시신은 대정교회 교인들이 수습하여 장사를 지냈으며 인근 삼방산에서 돌을 가져다 순교기념비를 세웠다. 이후 2003년 제주노회에서 순교자 이도종 목사의 순교자기념비를 새롭게 세웠다. 대정교회 앞에는 순교자기념비와 함께 오래된 대정교회의 기념종이 있다. 제주도는 전국에서 복음화율(5~7%)이 가장 낮은 지역이고 여전히 4.3사태의 아픔이 남아서 복음 전파가 어려운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90여 년 전 ‘종교의 길’(道宗)이라는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제주 방방곡곡을 누비며 복음을 증거하다가 순교 당함으로써 한 알의 밀알이 된 제주도출신 1호 목사 이도종의 헌신과 순교사실을 기억할 때, 머지않아 제주도에도 하늘의 영적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순교자 이도종 목사 기념비



 

-주소 :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안성리 1639 대정교회

사진 - 글 : (주)진흥투어,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