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소록도에 한센인들의 피땀으로 세운교회 ‘지라도’ 신앙
▲ 북성교회
1882년 한미조약 체결로 조선에도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1884년 10월20일, 개신교 최초 의료선교사인 알렌(H.N. Allen)부부가 들어와 의료선교의 기초를 닦고 있던 중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때 알렌의 서양의술을 통해 민영익이 구사일생으로 위기에서 생명을 건졌다. 알렌은 고종의 신임으로 제중원(濟衆院)(1886)을 세우게 되었으며, 1885년 4월5일에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부부가, 조선선교사로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선교사 파송을 받고 제물포로 첫 입국을 하였다.
당시 조선은 흔히 나병(癩病)이라고 부르는 한센병이 만연돼 있었는데, 1909년 4월에 미 남장로회 의료선교사 포사이드와 윌슨이 광주지역에서 한센병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해 1909년 여름, 윌슨 선교사에 의해 한센병 환자 10여명을 수용하여 치료를 하였다. 1925년 여천군 신풍리에 교회, 병원, 숙소 등으로 신축한 것이 지금의 ‘여수애양원’이다. 비슷한 시기 부산 상애원(1910), 대구 애락원(1913)이 외국인선교사에 의해 시작되는 등, 한국의 한센병 치료는 복음전파와 함께 본격화되었다. 한센병에 대한 불안이 높았던 만큼 선교사들의 한센인들을 위한 헌신적인 모습은 선교효과를 배가시켰다
▲ 지혜의원 전경
그러나 사립 나(癩) 요양소 세 곳만으로는 수용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던 중,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일본 총독부는 조선 통치의 근거가 되는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센병인들을 ‘반(反)사회인’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집단 격리코자 한센병원 개설을 추진했다. 이에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물, 육지와의 인접성, 그리고 구릉이 있어 환자 지대와 직원 지대로 나누어 격리수용하기 용이한 ‘소록도’를 최적지로 판단하고 섬 주민들을 설득하여 1916년 도립 자혜의원(현 국립소록도병원)으로 개원하고 100여명의 환자를 강제 수용하였다.
처음 5년간은 일본원장과 직원들이 원생들에게 일본식 복장과 음식, 신사참배까지 강요했으나, 제2대 하나이(花井) 원장은 달랐다. 그는 환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일본식 생활양식을 폐지하고, 본가와의 통신이나 면회를 허용하였으며 3년제 보통학교를 설립하고 독서, 체육활동을 장려했다. 무엇보다 신앙의 자유를 주어 1922년 일본 성결교단 다나까 신사부로 목사가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선교활동을 시작으로 구북리 1호사에서 예배드린 것이 소록도교회의 시작이다. 다나까 목사는 월1, 2회 오는 순회목사였기 때문에 통역관 박극순 씨를 교회지도자로 세워 주일과 수요예배를 주관케 하였다. 1923년에는 교인수가 120명에 달했고 남자40명, 여자4명이 구북리 서해안 백사장에서 다나까 목사로부터 최초 세례를 받았다. 한편 병실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하나이 원장은 일본 천조대신 신당을 예배처소로 허락하였는데, 1926년 다나까 목사가 부임하고, 1928년 예배당을 신축하였다(현 북성교회). 이어 같은 해 10월24일에는 남부예배당(현 남성교회)이 세워졌다
▲ 하나이원장창덕비花井院長彰德碑
이렇게 한센인들의 자력으로 예배당을 세우는 눈물겨운 고생은 말할 수가 없었다. 손가락이 없는 이들은 주먹손으로 피투성이가 되도록 벽돌을 만들고 나르고 쌓으며 손등에서 피고름이 뒤범벅이 되도록 애쓰고 힘써,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고독과 한센병의 고통 속에 신음하던 이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면서 불행의 땅 소록도는 감사와 찬송과 기도의 동산으로 변해갔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3장17,18절) 그들은 우리에게 건강이 없을지라도, 돈이 없을지라도, 명예가 없을지라도, 오직 ‘지라도’ 신앙으로 세상의 편견 속에서, 그리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믿음을 굳건히 지켜온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소록도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고난과 역경을 오직믿음, 오직 지라도 신앙으로 지탱하고 있었다. 소록도 한센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위해 하나님이 보내주신 하나이원장(花井院長)은 1921년부터 8년4개월 동안 병원을 환자중심으로 다스리다가 소록도에서 소천 했다. 원생들은 그의 아름다운 신앙을 기리며 돈을 모금하여 구북리입구 자혜의원 앞에 ‘하나이원장창덕비’(花井院長彰德碑)를 세웠다.
▲ 소록도 중앙교회
한센병은 병균이 약해서 쉽게 전염되지 않으며 조기 발견 시에는 100% 완치된다. 한국에서는 이미 1992년 세계 나학회(癩學會) 서울총회에서 한센병 종료 선언을 하여 이제는 이 병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고 또 지난해 3월 개통된 소록대교가 고흥군 녹동항과 소록도 사이를 이어 개통함으로 지리적 거리도 좁혀졌지만, 여전히 ‘지라도’까지 가지 않으면 소록도의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신앙은 그들에게 서만 찾을 수 있는 신앙이다.
-글 :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
'감리교뉴스 한국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교회사 65>매봉교회와 한국의 에스더 유관순 열사 (0) | 2016.01.12 |
---|---|
<한국교회사64>신사참배거부운동의 진원지- 강경성결교회 (한옥북옥교회) (0) | 2016.01.08 |
<한국교회사62> 예수이름으로 생매장된 여숫골의 3,000여명 순교자 (0) | 2016.01.08 |
<한국교회사61> 전북익산 두동교회‘ㄱ’자 예배당과 부자 박재신 (0) | 2016.01.08 |
<한국교회사60>아펜젤러 순직기념관 및 최초성경전래지, 마량진 (0) | 2016.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