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예수이름으로 생매장된 여숫골의 3,000여명 순교자
▲ 해미성
서해대교를 지나 군산 방향으로 고속도로를 따라 달리다보면 해미인터체인지가 나온다. 그곳을 통해 조용한 소도시 해미읍의 중앙대로로 들어서면 곧 좌측으로 높이 솟은 웅장한 순교자기념탑을, 우측으로 병인박해 때 인근 13개 군현에서 수천 명의 신자들을 잡아다가 가두고 고문하고 참혹하게 처형했던 해미읍성을 만나게 된다. 해미순교지는 예수이름으로 3,000여명이 산 채로 생매장 당한 여숫골(예수마리아) 순교의 현장이다.
충남 서산 해미는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500년 전에 축조된 석성(石城)으로, 당시 병마절도사의 주진(主鎭)이 설치되어 충청도 지방의 군사중심지 역할을 했다. 유명한 이순신 제독이 젊은 시절 이곳에서 군관으로 근무했던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아무튼 그러한 이유로 조선시대 해미읍성의 문화는 엄격한 통제와 군율이 다스리는, 서양의 문물을 배척하는 기세가 남다른 곳이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 해미성당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그리고 천주교도 1,000여명이 한 번에 처형된 병인박해(1866) 등 대표적인 조선조정의 천주교 탄압 때, 뿐만 아니라 1790~1890년에 이르는 100여 년 동안 끊임없이 신자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곳이 바로 해미다. 이 긴 박해기간 동안 해미 진영의 감옥 두 곳에는 천주교 신자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가 교수형, 참수형, 석형(돌을 던져 살해) 백지사형(白紙死刑 손을 묶고 상투 풀어 결박, 얼굴에 물을 뿜고 백지로 질식시킴), 동사형, 그리고 돌다리 위에서 팔다리를 돌에 메어치는 자리개질 형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방법으로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 당시 해미읍성 서문 밖은 천주교인들의 시체로 산더미를 이루고 그 피가 내를 이룰 정도였다고 하니 그 박해의 정도를 짐작할 만하다.
▲ 해미순교탑
특히 1866년 병인박해부터 1868년 무진박해까지의 대 박해시기에는 한꺼번에 죽이기 위해 여러 명을 눕혀 돌기둥을 떨어뜨리거나 해미진영 서쪽들판에 수십 명씩 끌고 가서 손을 묶고 구덩이에 집어넣어 흙과 자갈로 덮어버리는 생매장을 자행했는데, 이때 순교자의 수가 3,000명에 달했다는 것이다. 당시 신자들이 죽어가면서도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기도하다가 숨을 거두었는데, 이를 ‘여수머리’(여우머리)라고 잘못 알아들은 주민들의 입을 통해 ‘여숫골’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하니 그 참혹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또한 여름철 더위에 구덩이를 파기 귀찮으면 밧줄에 묶인 신자들을 둠벙(웅덩이)에 거꾸로 쳐 박아 수장시키기도 했는데, 이를 ‘죄인들이 죽은 곳’이라 하여 ‘죄인둠벙’이라 일컫다가 ‘진둠벙’이라는 명칭이 생기기도 했다.
현재 이곳 생매장터에는 높이 16m의 순교자기념탑과 교회가 세워져 있다. 그 근처에 ‘진둠벙’과 예수고난의 14처 돌에 새긴 기념비, 노천성당 등이 있고, 합장묘 성지 안에는 발굴된 유골 전시로 당시의 일을 증언하고 있다. 또한 해미읍성에는 당시 신자들을 매달아 처형했던 호야나무(회화나무)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순교자들의 아픈 흔적을 증언하며, 서문 밖 순교지에는 1866년(고종 3년)의 병인박해 때 신도들을 처형했던 자리개돌이 보존되어 있어 그날 흘러내린 붉은 피를 짐작하게 한다. 이로써 해미읍성은 문화유적지일 뿐만 아니라 여숫골을 찾는 순례자들의 발길과 관광행렬이 끊이지 않는 가톨릭성지로 대표적인 명소가 되고 있다.
▲ 호야나무
해미읍성은 조선시대 가톨릭에 대한 박해와 순교가 가장 극심했던 지역으로, 가장 많은 이들이 순교한 곳이다. 하지만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이들 순교자 중 70여 명만이 이름과 출신지를 남기고 있을 뿐, 대부분의 신자들은 당시 천대받는 민중이었던 탓에 이름조차 알 길이 없어 안타까움을 더해준다. 그러나 인간이 쓴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더라도 예수 이름으로 신앙을 지키다가 무참히 순교당한 무명의 순교자들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록에는 하나하나 또렷이 기록되어 있을 것을 믿으며, 오늘도 순교자의 피로 만든 기도의 길을 따라 걷는 순례자들의 마음은 더욱 숙연해진다.
-주소 : 충남 서산 (해미IC에서 45번 국도를 타고 서산방향으로 5분 거리)
- 글 :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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