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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49>신사참배 반대로 순교한 한국의 사도 바울, 이기풍 목사

박경진 2016. 1. 6. 11:30

 

49. 신사참배 반대로 순교한 한국의 사도 바울, 이기풍 목사

 

 

▲ 이기풍 목사 선교기념비

 

 1865년 평양에서 출생한 이기풍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주변사람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증조부가 홍경래의 난 당시 역적으로 몰려 황해도로 피신하여 살았던 탓에 입신양명은 꿈도 못 꾸고, 또 조선이 외세에 의해 몰락해가는 암울한 현실에 절망하여 젊은 시절을 싸움과 술로 낭비했다. 그런 이기풍이 서양 오랑캐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890년 어느 날, 평양 장터에서 노방전도를 하는 마펫(S. A. Moffett, 마포삼열) 선교사를 발견한 이기풍은 마펫 선교사에게 다가가 돌을 던져 턱을 크게 다치게 했다. 또한 그는 건축 중인 장대현교회를 때려 부수는 등 ‘기독교복음의 훼방꾼’으로 유명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평양은 전쟁터가 되었다. 기근과 포화의 위험을 피해 이기풍 일가 모두가 원산으로 피난했지만, 생계를 위해 담뱃대에 그림을 새겨 파는 고된 일을 해야 했다. 하루는 길을 걷다가 앞을 지나치는 스왈른(W.L.Swallen) 선교사를 만났는데, 자신이 평양에서 돌로 친 마펫 선교사가 떠올라 크게 후회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차마 앞에 나설 수가 없어서 우물쭈물 하다가 지나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이 될 사람이니라.”는 음성을 듣게 되었다. 꿈에서 깬 그는 눈물 속에 죄를 고백하게 되고, 그간 자신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권하던 ‘김석필’을 찾아 상의하였다. 그는 이기풍을 데리고 스왈른 선교사에게 갔고, 1896년 8월 15일 스왈른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고백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 국내성지순례우학리교회 (2011.3.30 )

 

이기풍 목사는 1898~1901년까지 매서인(賣書人)으로 함경남북도 일대를 돌며 성경을 판매 보급하며 복음을 전파했다. 또한 1902-1907년까지 스왈른 선교사의 조사(助事)로서 황해도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전도에 힘썼다. 더불어 1902년부터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마침내 1907년 6월 20일 평양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리고 그해 9월 17일 장대현교회에서 최초로 서경조, 길선주, 한석진, 방기창, 송인서, 양전백 등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음으로써 한국인 최초 목사 7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9월 19일에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되어 ‘한국장로교 첫 외지선교사’가 되었다.

 

 제주도를 향해 떠난 이기풍 목사는 인천을 출발하여 목포에 도착했지만 풍랑이 너무 심해 가족을 남겨둔 채 혼자 제주도로 향했다. 그러나 거센 풍랑 속에 좌초하여 표류하는 등 구사일생을 겪고 난 이듬해, 1908년 봄에야 제주도에 도착한다. 당시 제주도는 육지와 전혀 다른 언어, 문화, 환경으로 또 기독교에 대한 편견과 핍박이 대단해서 그는 극심한 굶주림과 생활고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영육의 고단함으로 지쳐가던 그는 전도를 나갔다가 해안가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던 한 해녀의 도움으로 생명을 구했고, 처음으로 대화를 하게 된 이기풍 목사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생명의 은인인 그 해녀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해녀가 복음을 받아들여 첫 열매를 맺음으로써 제주선교의 아름다운 역사가 시작 되었다.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에서 약 7년 동안 사역을 하면서 제주 성안교회를 중심으로 금성, 삼양, 성읍, 조춘, 모슬포, 한림, 용수, 세화 등의 교회를 개척하여 제주선교의 기초를 다졌다. 그리고 1916년 전라남도 광주 북문내(안)교회에 초대목사로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순천읍교회, 벌교교회 등지에서 사역했으며, 돌산, 완도를 순회하며 교회를 개척하였다. 1921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제 10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당선되기도 한 이기풍 목사는 부흥하고 안정된 교회를 떠나 전도자의 고단함을 택하는 진정한 사도였다.

 

 그는 1934년 칠순의 노구를 이끌고 누구도 선뜻 가기를 꺼려하는 땅끝마을 작은 섬, 우학리에 들어가 전도를 시작하였다. 그 와중에 1936년을 기점으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닥뜨린 이기풍 목사는 단호하고 분명하게 당당히 신사참배를 반대했고, 그 결과 1938년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구속 수감되어 모진 고문을 겪었다. 72세의 고령으로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앙의 절개를 지킨 이기풍 목사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보석을 받아 우학리로 옮겨졌고, 1942년 6월 13일 주일 부축을 받으며 마지막 성찬예식을 거행한 후, 1942년 6월 20일 77세를 일기로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 성지순례전문위원회 성지탐방이기풍 기념관 (2009년)

 

그는 사도 바울처럼 선교사를 향해 돌을 던지던 깡패가 매서인이 되었고,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어 제주도에 복음의 씨앗을 심었다. 그리고 그 복음을 지켜내기 위해 일제의 모진 고문과 회유를 견디다가 결국 순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의 이러한 보석과 같은 삶은 일제강점기 말 신사참배 문제로 부끄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교회에 희망이자 다시 부흥할 근원이 되는 한 알의 밀알이었다.

제주도의 최초교회인 성안교회 뜰에는 1984년 교회창립 76주년을 맞아 성도들이 직접 세운 <이기풍 목사 선교기념비>가 있다. 또한 제주도 <이기풍선교기념관>에는 그와 관련된 제주의 기독교 선교역사 자료가 집대성되어 전시되고 있다.

-주소: 전남 여수시 남면 우학리 223번지 (담임 조강석 목사)

 

 

-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 (02-2230-5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