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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51> 독립신문을 창간한 선구자 송재 서재필박사 이야기 (1)

박경진 2016. 1. 6. 11:42

 

51. 독립신문을 창간한 선구자 송재 서재필박사 이야기 (1)

 

송재(松齋)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은 1864년 전남 보성, 그의 외가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까지 성장했다. 그는 용모가 준수하고 재능이 남달라 한양의 외숙 밑에서 한학을 배웠는데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터득하는 수재로 이목을 끌었다. 마침내 나이18세이던 1882년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교서관 부정자 벼슬에 오르게 된다. 당시 개화파 인사들과 점차 교유하면서 개화사상을 체득하게 된다.

 

▲ 송재 서재필 박사

 

1882년6월 임오군란을 치르면서 조정은 국방근대화의 시급함을 절감하게 된다. 이때 개화파의 거두 김옥균의 권유로 그는 1883년 5월 일본에서의 군사교육 기회를 얻어 유학길에 오른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야마 육군군사학교에서 1년간 군사훈련을 받으며 자신감에 넘치던 서재필은 귀국 후 조련국의 사관장이 되었다. 일본 유학을 통해 급진적인 개화혁신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서재필은 마침내 1884년 12월4일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이 주도한 갑신정변에서 사관생도들을 지휘해 창덕궁을 장악하고 민태호 등 수구파를 척결했다. 그러나 청국 군을 앞세운 수구세력의 힘 앞에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나버리고 주도했던 개화파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역적으로 몰린 서재필의 부모와 아내, 형은 음독자살, 동생은 처형되었고 두 살 아들은 돌보는 이가 없어 굶어죽었다.

 

▲ 서재필 생가

 

 일본에서도 냉대를 받던 서재필은 미국선교사의 도움으로 1885년 4월 미국으로 건너가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무혈단신 미국에 도착한 서재필은 의지할 곳 없는 거지처럼 기거하며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밤에는 YMCA를 찾아 이를 악물고 영어공부를 하였다. 그는 이때 기독교신앙에 의지하여 꿈을 갖게 되었고 교회에서 만난 탄광 경영자 홀렌백의 도움으로 힐맨고등학교에 입학, 4년 과정을 죽을힘으로 공부해 2년 만에 우등으로 졸업했다. 이때부터 그는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란 미국식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그 후 컬럼비아 의과대학(조지 워싱턴의과대학의 전신)에서 수학하여 1892년에 의사가 되었다. 이에 앞서 1890년에는 조선 사람으로 최초미국시민권자, 최초 미국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미국 철도우편 사업 창설자 암스트롱의 딸 뮤리엘과 결혼을 하였다.

 

 한편 조선에서는 1894년 갑오개혁이 단행되었고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마침내 역적의 죄명이 벗어지게 되었다. 서재필에게 이 소식을 들고 찾아온 갑신정변의 동지 박영효로부터 국내 사정에 대한 놀라운 소식을 접한 그는 다시 한 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부모, 형제, 처자식에 대한 통한의 슬픔과 송구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박영효의 강권을 이기지 못한 서재필은 조국근대화 개혁에 기여하고자 하는 꿈을 품고 1895년 12월, 조국을 떠난 지, 11년 만에 다시 미국인의 신분으로 고국으로 돌아온다. 귀국 후 중추원 고문직을 맡았으나, 실제로는 개화운동의 선구자로서 민중계몽 사업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독립신문 창간호

 

조국의 사정은 과거 갑신정변 때와 다를 바 없이 여전히 비민주적 사고와 외세 의존적 사대주의에 젖어있었으며 조정에서는 끊임없이 정쟁을 일삼고 있었다. 이에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실패를 교훈삼아 위로부터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실질적 개혁을 위해 국민계몽과 사회개혁 운동에 역점을 두기로 결심한다. 1896년 4월7일 드디어 최초의 한글신문이자 민간신문인《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계몽운동과 개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이상재·이승만 등과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의 조직화를 도모하고 사대외교의 상징이던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명명하여 신축하였으며, 역시 사대주의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어내고 새롭게 ‘독립문’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민족의 자주독립정신 선양을 선언하였다. 그 뿐 아니라 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서양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강의를 시작했다. 이 때 이승만 등 많은 개화 인사들이 그의 강의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한국개화기의 중요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 전남 보성의 서재필 기념공원

 

자주독립, 부국강병을 목표로 한 서재필의 개혁, 계몽운동으로 말미암아 점차 서민들의 의식이 깨이기 시작했고 독립을 요구하는 주장에도 불이 붙기 시작했다. 이로 말미암아 서재필의 인기는 상승되고 국민들의 목소리도 높아져 종로거리 대중연설 장에 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조정 관료들의 실정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공개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면서 민주주의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정 관료들은 서재필을 눈엣 가시처럼 여기게 되었고 모함하고 시기, 질투하는 세력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이 생명의 위험을 직감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수구파 정부 관료들과 일본, 러시아의 세력들이 합세하여 그를 다시 미국으로 추방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서재필은 개화 혁신의 선봉에 섰기 때문에 그에 따른 희생도 감내해야만 했다. 역적으로 몰린 가족들은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그는 타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정처 없는 길을 걸어야만 했다. 하지만 세월이 바뀌어 다시 개화를 완수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지만 조국은 여전히 그가 꿈꾸는 개화된 민중시대를 열기에는 캄캄하기만 했다. 조선정부는 이들의 희생적인 활동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재필이 시작한 개화운동은 봉건적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조선 사회에 자주독립사상과 자유민주주의사상의 씨앗을 뿌리는데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때문에 푸른 꿈을 안고 다시 찾았던 조선의 선구자 서재필은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서재필 2편은 다음에)

 

 

사진 -글 :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