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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48>선한 사마리아인-포사이드와 최흥종의 한센병원 이야기

박경진 2016. 1. 6. 11:24

48. ‘선한 사마리아인’-포사이드와 최흥종의 한센병원 이야기

 

▲ 오방 최흥종 목사                             ▲포사이드 선교사

 

한센병에 걸린 이들은 인간취급도 받지 못했던 조선 말, 그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은 한 선교사가 있었다. 1900년대 초 목포지역에서 의료사역을 하며, 특히 한센병 환자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나환자의 아버지’라 불린 포사이드(W.H. forsythe 1873-1918)선교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목포지역에서 의료선교사역으로 분주하게 보내다가, 1909년 4월 어느 날, 광주에서 사역하던 친구 오웬(C.C. Owen)선교사가 지방 전도를 갔다가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긴급한 전보를 받게 된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배를 타고 영산강을 거슬러 나주에 도착하여 다시 말을 타고 광주로 향하다가 나주지역 길옆에서 가마니를 뒤집어쓴 채 신음하고 있는 한센병 환자(여인)를 발견했다. 그는 입고 있던 털외투를 벗어서 한센환자에게 입히고 자신의 말에 태우고 걸어서 광주까지 도착했는데, 이는 예정보다 하루가 더 걸린 것이었다. 비록 그는 친구가 죽어가고 있다는 전보를 받고 가는 길이었지만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믿고 또한 인간의 생명은 누구나 소중한데 불쌍한 한센환자의 죽음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돌보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광주에 도착하여 그를 병원으로 데리고 들어갔으나 이미 있던 환자들의 거센 반발로 밀려나와 벽돌 굽던 가마굴에 임시로 나환자를 수용하고 역한 냄새와 피고름이 터져 흐르는 손과 발을 만져가며 지극 정성으로 치료해 주었다. 그러는 사이 긴급을 요하던 친구 오웬 선교사는 벌써 죽어서 장례를 치렀다.
포사이드 선교사가 문둥병자를 치료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광주 인근의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광주에 있던 선교사들은 급한 대로 양림동에 세 칸짜리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해 환자 7명을 수용했다. 그리고 이후 무등산 자락에 정식으로 요양원 건물을 마련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 한센병 전문병원인 ‘광주나병원’의 출발이 되었다.

 

한편, 포사이드 선교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최흥종(崔興琮, 1880-1966)이다. 최흥종은 젊은 시절 망치란 별명으로 장터와 뒷골목을 주름잡던 주먹이었다. 그는 6세에 어머니를 잃고 19세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처지를 비관하여 정신없이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열한 살이나 어린 배다른 동생이 “형은 사람 때리는 게 그리 재밌어?” 라고 울먹이며 물었다. 그 뒤 마음을 잡은 그는 광주 양림동에서 선교사의 조수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포사이드가 나환자를 말에 태우고 들어오는 것을 목격하였다. 포사이드는 환자의 겨드랑이를 양손으로 부축하면서 옮기고 있었는데 그때 환자가 들고 있던 지팡이를 놓쳐버리자 포사이드는 옆에 있는 최흥종에게 그 “지팡이를 주워 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잠시 망설이며 머뭇거렸다.
 피고름이 잔뜩 묻은 지팡이를 선뜻 잡지 못했던 최흥종은 포사이드 선교사의 살신성인적인 헌신을 지켜보며 ‘같은 민족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문둥이를 자기 자식처럼 보호하고, 어찌 저렇게 돌볼 수 있을까?’ 하며 깊은 감화를 받았다. 그로부터 최흥종도 역시 포사이드 선교사처럼 자신의 전 재산을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내놓았다.
 포사이드와의 숙명적 만남을 통해 가슴이 뜨거워진 최흥종은 1912년 광주 북문안교회(현 광주제일교회) 초대장로가 되었고, 1917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면서 북문밖교회(현 광주중앙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그 후로 광주나병원 초기 역사의 주역으로서 나환자를 위한 일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최흥종은 나환자촌 확대요구를 위해 나환자 수백 명과 함께 서울까지 11일간의 행진을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문둥이행진” 이라 불리었다. 마침내 총독에게 전남 고흥 소록도 나환자촌을 확대해줄 것을 요구해 오늘날 소록도 나환자 갱생원이 설립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조선에 사랑과 섬김의 씨앗을 심어주고 있던 많은 선교사들까지 포사이드 선교사야 말로 ‘인간으로 오신 예수’ 라고 존경했었는데 그마져 자기의 생명처럼 사랑하고 돌보던 한센환자들을 돌볼 수 있는 한센병원이 생기기 전인 1911년 스푸르병에 걸려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그는 미국에 가서 “조선은 앞으로 아시아 선교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라고 외치며 조선의 사정을 알려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유치하는 데 힘썼다.
 매일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타인을 괴롭히던 깡패가 가장 낮은 곳에서 외면당한 나환자들의 아버지가 되어 그들을 돕고 거처를 마련하고, 상처를 치료하는 등 그들을 위해 살았다.
이러한 포사이드 선교사와 최흥종의 헌신으로부터 복음의 빛이 한국 땅 전역에 퍼졌으며 마침내 한국은 세계 선교의 중심이 되었고 찬란히 빛나는 복음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글 : 진흥홀리투어,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 (02-2230-5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