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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46.> 강화 홍의교회 초기신자들의 성경대로 살던 이야기

박경진 2016. 1. 6. 11:19

 

 

46. 강화 홍의교회 초기신자들의 성경대로 살던 이야기

 

인천광역시 강화도의 복음화율은 30% 정도(2009년 통계)로 전국에서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이다. 이렇게 높은 복음화 율을 가지게 된 데는 과거로부터 이어진 특별한 사연들이 있는데, 오늘은 그중 강화교산교회(1893년)에 이어 강화도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홍의교회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한다.

 

 

▲ 홍의교회 전경(좌측),  1952년 2월 완공된 홍의교회 예배당(우측 상단)

 

 

1892년 미국 감리교회소속 존스(G.H. Jones) 선교사에 의해 세례를 받은 이승환과 그의 어머니로부터 강화교산교회가 시작되었다. 강화교산교회는 당시 선교사의 입촌(入村)을 반대하던 서당 훈장 김상임(김초시로 불림)이 회심하여 참여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그 김상임이 개종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달려간 친구 ‘박능일’이 오히려 김상임에게 감복되어 복음을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와 교회를 세우니, 바로 ‘홍의교회’가 시작된 것이다.(1896년) 이후 박능일은 서당을 학교로 바꿔 새로운 서양식 교육 방법을 받아들였으며, 선교사의 도움 없이 1896년 서당학생 20명과 종순일, 권신일과 함께 토담집으로 예배당을 건축했다. 그리고 불과 1년 만에 홍의교회 교인수가 80명이 넘게 갑자기 늘어나게 되었다.

 홍의교회에는 초석이 된 7명의 교인들이 있는데, 그들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면서 성경말씀을 읽고 그 내용을 있는 대로 믿고 실천하기로 하였다. 즉, ‘믿음 안에서 하나’인 것과 ‘믿음의 첫 열매들’이라는 것을 믿고 신분(사농공상)과 서열(족보)의 전통을 버리고 한 형제됨을 나타내기로 하였다. 하여 성경에서 좋은 의미로 사용되는 능(能), 신(信), 경(儆), 봉(奉), 순(純), 천(天), 광(光)자를 적은 종이를 자루에 넣고 제비뽑기를 하여 이름의 가운데 글자를 삼고, 끝 자를 돌림자 한 일(一)자로 개명하니, 이로써 박능일(朴能)一), 권신일, 종순일, 김경일 등 홍의교회의 초기 신자 7명은 모두 새 이름을 갖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의미로 검은색 옷을 입고 다녀 믿지 않는 이들로부터 ‘검정개’라는 비웃음과 조롱을 받기도 했다.

 

 이들 중 종순일에 관한 일화가 ‘대한그리스도인회보’에(1900년) 실렸다. 그는 마태복음 18장 23-35절의 말씀을 읽고 모든 채무자들을 집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성경말씀을 읽어준 후 빚 문서를 꺼내어 불사르고 나서, “여러분이 내게 진 빚은 다 없어 졌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날 빚을 탕감 받은 채무자들이 하나같이 교인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종순일은 마태복음 19장 16-22절의 말씀, 즉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는 말씀을 따라 전 재산을 처분하여 교회에 헌납하고 부인과 함께 전도자로 나섰다.

종순일 부부는 강화 남쪽 길상을 시작으로 석모도 주문도 영종도 등의 외딴섬을 다니며 전도하였다. 권신일은 박능일이 1899년 인천 제물포교회의 교사로 나간 후 홍의교회를 지키다가 김경일에게 교회를 맡기고 교동도와 서해의 섬 일대에 자원해 들어갔다. 그의 조카 권혜일은 강화에 인접한 섬을 돌며 복음을 전했으며 홍의교회를 섬기던 권신일은 교동도에서 교동읍교회를 세우고 목사를 도와 일했다. 또, 박능일은 1900년 강화읍교회를 세워 홍의교회처럼 강화의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파했다. 이들은 항상 검정 옷을 입고 다니며 경건한 신앙을 지켰다. 그로인해 강화도에서는 특히 홍의교회 일자(一字)신앙의 전도인 들은 열정과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강화선교 10년 만에 전 지역에 걸쳐 교회가 세워지는 괄목할 만한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덕주 교수의 <눈물의섬 강화이야기>에서)

이처럼 1893년 교항교회(현 강화교산교회)에서 발원한 복음의 물줄기는 홍의교회(1896)를 거쳐 강하게 소용돌이치며 강화 전 지역으로 힘차게 퍼져 나갔다. 홍의교회는 교산교회에서 받은 복음의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또한 기독교를 우리 것으로 토착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교의 전초기지로 사도행전의 안디옥교회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인구 68,000여명에 불과했던 강화도에 그후 홍의교회와 같은 감리교회가 130여 곳이나 세워졌으니, 당시 초대교회 신앙의 그 열정을 가히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홍의교회는 복음의 불모지이었던 강화 구석구석에 복음을 전파하며 기독교를 토착화하고 성경말씀을 삶으로 실현하였다. 반상(班常)을 초월해 하나님 안에서 평등함을 일깨우고, 성경대로 살고자 했던 홍의교회 교인들의 신앙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큰 도전과 깨우침을 주고 있다.

 

 

-주소: 인천시 강화군 송해면 상도리 943

 


사진-글 :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