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첫 번째 양화진에 묻힌 헤론선교사
▲ 존 헤론 선교사
영국태생의 존 헤론(John W. Heron. 1858~1890)은 미국의 테네시종합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개교 이래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뛰어난 인재였다. 그는 실력을 인정받아 테네시대학 교수로 초빙 받는 등 대단한 이목을 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선교사 가기를 지망하였기에 이를 모두 거절하였다. 그는 이수정이 보낸 편지가 실린 더 월드 미셔너리《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잡지에서 큰 감동과 도전을 받았기 때문이다.
“미국사람들이여!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주시오! 조선 백성들은 아직도 문명의 밝은 세계를 모르는 암흑 세상에서 깊은 잠에 빠진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의 호소는 구원의 손길을 찾아 절규하는 부르짖음이었다. 이 간절한 호소에 감동된 헤론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는 주님의 명령에 사로잡혀 조선을 향한 불타는 선교열정을 품게 되었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 6:8)
헤론은 환상가운데 마케도니아 사람이 손짓하는 것을 보고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발길을 돌렸던 사도바울의 발자취를 생각했다. 바울의 이 발걸음이 마침내 유럽을 찬란한 기독교문화로 꽃피우게 했을 뿐 아니라 세계선교의 발판이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서 조선선교에 대한 부푼 꿈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헤론에게는 이미 약혼한 상대가 있었다. 그녀가 병원이나 약국도 없는 가난하고 미개한 나라에 가서 어떻게 살 수 있겠느냐고 근심하며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헤론과 결혼한 후 대학에서 교수직을 가질 줄 알았는데 미개한 나라에 선교사로 떠난다는 것은 청천벽력과 같아서 만류했던 것이다. 그러나 혜론의 조선을 향한 선교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마침내 1884년 봄, 그는 북장로교 조선선교사로 첫 번째 임명을 받아 일본으로 떠났다. 바로 이 때 일본에서 “조선의 마케도니아사람” 이라 불리는 이수정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조선의 풍속과 언어를 익히며 조선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 일행이 조선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헤론선교사 부부는 마침내 1885년 6월 21일 제2진으로 스크랜턴 선교사들과 함께 제물포에 도착한다.
한편 조선은 ‘갑신정변’으로 나라 안의 정세가 어수선했다. 구사일생으로 생명의 위기를 넘긴 민영익은 서양의술에 대해 놀랬고 그의 주치의 알렌은 최초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의 초대원장이 되어 있었다. 그 후 알렌이 고종의 주치의가 되면서 그 뒤를 이어 1887년 헤론이 마침내 광혜원의 제2대원장이 되었다. 이때 병원이름을 ‘제중원’으로 바꾸고, 특권층뿐만 아니라 민중을 위한 병원으로 백성들의 병을 돌보는데 정성을 다했다.
그 뿐 아니라 헤론은 1890년 6월 25일 ‘한국선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를 창설하여 기독교 문서출판의 역사적인 문을 열기도 하였다. 이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5년 동안 격무에 시달리던 헤론은 가족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휴가를 떠난다. 그런데 때마침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날 밤중에 제중원에서 말을 몰고 달려온 사람이 죽어가는 위급한 환자가 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혜론 선교사는 쉬는 것을 접고 그 밤에 발길을 돌려 제중원을 향하였다. 밤새워 비를 맞으며 지칠 대로 지친 그는 제중원에 도착하자마자 그냥 쓰러지고 말았다. 원래 서양 사람들은 한국의 풍토병을 이길만한 면역성이 약해서 충분한 휴식으로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의욕이 넘쳤던 헤론 선교사는 병에 걸린 조선백성들을 위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혹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일로 그는 끝내 전염성 이질을 극복하지 못하고 말았다. 테네시대학 교수 자리도 뿌리치고 부족함이 없는 삶의 보금자리도 떨쳐버리고 이 땅에 복음의 횃불을 들고 찾아왔던 첫 선교사 혜론은 내한한지 5년 만에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을 하나님께 맡기고 1890년 7월 26일 33세의 청춘을 불사르며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뜻밖의 슬픔을 당한 가족과 선교사들은 미국공사와 논의 끝에 헤론을 조선 땅에 묻기로 하고
우선 선교사사저 마당에 몰래 가매장을 하였다. 당시 4대문 안에 매장하는 것은 절대 불가했다. 그 후 3년 만에 고종이 양화진을 외국인묘지로 특별히 윤허하여 지정됨으로 1893년 10월 24일 헤론은 양화진에 잠들게 된 것이다. 이로써 미국 북장로교의 첫 번째 조선 선교사로 임명받은 헤론은 양화진에 또한 첫 번째로 묻힌 선교사가 되었다.
▲ 존 헤론 선교사의 묘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단12:3)
그의 조선선교사역 5년의 짧고 굵은 삶은 풍토병,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대 제중원의 원장으로 조선백성들에게 영육을 아울러 치유하는 의사로, 선교사로 별과 같이 빛나는 삶을 살았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5만 교회 1000만의 성도로 성장하게 된 것은 바로 헤론과 같은 이들의 위대한 헌신과 희생의 대가요 큰 열매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주소 :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144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144(양화진선교사묘원)
-글 :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 (02-2230-5113)
'감리교뉴스 한국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교회사11>야월교회 전교인 65명 순교자들의 흔적 (0) | 2016.01.05 |
---|---|
<한국교회사10>대한민국의 여성 1호박사 우월(又月)김활란 (0) | 2016.01.05 |
<한국교회사8>두암교회 23인 순교자 이야기 (0) | 2016.01.05 |
<한국교회사7>강화교산교회와 유학자 김상임의 개종이야기 (0) | 2016.01.05 |
<한국교회사6>‘조선의 마케도니아인 이수정 (0) | 2016.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