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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7>강화교산교회와 유학자 김상임의 개종이야기

박경진 2016. 1. 5. 16:07

7. '강화교산교회와 유학자 김상임의 개종이야기'

 

 

 

 

                                                                                                     ▲ 강화교산교회

 

                                                            

                                                                                                ▲ 교산교회 공덕비

 

 

 

강화교산교회는 강화도의 모 교회로서 교동도를 비롯하여 인근의 섬들에 교회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어머니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지역사회에서 늘 앞장서서 장자교회다운 몫을 다하고 있다. 강화교산교회에 처음 복임을 전한 사람은 미국감리회 존슨목사(조원시)로서 그는 최초 선교사 언더우드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다음으로 내한한 스물한 살의 최연소 선교사였다.

 

존슨 목사는 인천 제물포교회(현내리교회)를 맡고 제물포지방 감리사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인천과 가까운 강화도를 선교거점으로 삼고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는 1892년 강화도에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로 피해를 입은 강화도 사람들이 서양 사람들이라면 치를 떨면서 반대하였다. 또한 굴욕적인 강화도 조역을 맺음으로 가슴에 맻혀진 응어리가 풀리기는커녕 가슴이 쓰리고 아픔을 견디며 외세에 민감하던 강화도민 들은 서양 코쟁이가 어디다 발을 들여 놓느냐고 남문 밖에서 배척을 당해 쫓겨나고 말았다

 

 

 한편 존슨선교사는 인천내리교회를 바탕으로 사람들의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서 계를 조직하고 곗날을 주일 날로 정하는 등 상인들을 교회로 끌어 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온당치 못한 삶의 방식으로 시작된 목회방법으로는 오래 유지 할 수 없었다.계가 처음에는 잘 될것으로 보이며 계원이 5ㅐ여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계를 타먹고 도망가는 사람이 생기면서 계가 깨져 흩어지고 경우 두명만 남게 되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강화 출신 이승환 이었다. 그는 강화군 서사면 시루미 마을 출신으로 제물포에서 주막집을 운영하며 내리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는데 존슨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으라는 권고를 들었다. 그러나 자신이 '세례를 받을 수 없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였다.

첫째는 연로하신 어머님보다 먼저 세례를 받을 수가 없고, 둘째는 주막에서 술을 팔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후 존슨 목사는 임종을 앞둔 이승환의 모친께 세례를 베풀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서둘러서 세례를 베풀기 위해 배를 타고 강화로 갔다. 그러나 역시 그 곳 토박이 양반이요 유학자인 김상임을 필두로 주민들의 완강한 반대로 배에서 내릴 수 조차 없었다. 그러나 이승환은 모친을 업고 갯벌에 빠지면서 배로 올라가 달밤에 선상세례를 받았으며 이어서 자기도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이승환은 강화선교역사에 기초를 놓은 역사적인 기록을 남겼다. 마침내 존슴선교사는 이승환의 집을 거점으로 강화도에 최초 교회를 탄생 시켰으니, 1893년 봄 강화교산교회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강화선교는 마침내 유학자 김초시(김상임)의 개종으로 급물살을 타게 되었는데 김상임은 나이 40세에 승부 초시에 합격한 양반으로서 그는 교향에 서당을 차리고 후학을 양성하며 지역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훈학선생이었다. 그러한 양반신분의 김초시는 이승환과 그의 모친의 선상세례 소식을 전해 듣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서양선교사 그 놈을 한번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마침내 이승환의 안내로 갓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점잔은 서양 신사 존스가 김상임을 찾아와서 '형제님' 하면서 넙죽 큰 절을 올렸다. 그의 사려 깊은 행동에 마음이 움직여 마침내 1894년 10월 마을 최고 유지였던 김상임 초시가 개종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의 개종은 부녀자와 천민들의 종교로만 알았더 주민들의 생각을 완전히 긍정적으로 바꿔 놓은 놀라운 계기가 되었다.

 

 

 강화지방에서 훈학자요 유지였던 김상임의 개종으로 강화교산교회는 갑자기 교인수가 50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는 말씀중심의 신앙으로 경건한 믿음생활에 전념하였다. 1896년 5월부터 교향교회 전도사의 사역을 하던 김상임은 1898년 본처전도사 직분을 받고 강화구역 10여 곳의 교회(가정교회 포함)를 맡아서 선교 사역에 힘썼다. 그는 목회자 양성과정인 인천신학회와 1900년 평양 신학회에서 공부를 하면서 목회자 수련을 쌓았다. 1902년 4월에는 한국최초 목사안수를 받은 김기범, 김창식 목사에 이어 3번째 목사후보자에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역사의 세번째 목사가 탄생되는 이 영예롭고 자랑스러운 때를 넉 달 앞두고 그는 열병환자들을 심방히디기 감염되어 안타깝게도 본처전도사 김상임은 나이 5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었다. 강화교산교회는 다른 섬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전초기지가 되었으며, 이러한 헌신의 터전위에, 복음의 씨앗은 전파의 흐름을 타고 선교개시 10여 년 만에 강화도 마을마다 교회가 설립되는 결과를 얻었다. 또한 120여년의 선교역사가운데 전국 어느 지역보다도 강화도의 복음화 율은 가장 높은 지역이 되었으며 130여교회로 부흥 성장한 것은 강화교산교회 에서와 같이 초대교회 신앙의 기반이 든든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주소 : 인천시 강화군 양사면 교산리 504 강화교산교회(담임 박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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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 진흥홀리투어 대표 박경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