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교졸업 학력으로 기업 일궈… 기독매체에 칼럼 집필 해외입양아 초청 행사도 18년째… 400명 한국 다녀가 “내 눈 뜨게 해주고 실종된 여동생 살아 돌아왔으면…” |  | | ▲ 서울 신설동 진흥문화사 회장실에서 박경진 회장이 최근 만화로 펴낸 자서전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박 회장은 지난 6월 초, 장로회총연합회장으로 취임하던 날, 이 책을 참석자들에게 무료로 배포했다. |
한국원로만화가협회 권영섭 회장이 최근 한 기업인의 드라마틱한 삶을 만화로 그려내 화제가 되고 있다. 만화 속 주인공은 박경진 진흥문화(주)(73) 회장. 진흥문화는 우리나라 성화캘린더 업계의 선두주자이다. 국내는 물론 미국·일본의 한인교회에 이 회사 달력이 걸리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한 해 640여만 부까지 찍었다. 기독교서적 출판사, 기독교용품 팬시, 진흥홀리투어 등 5개의 자회사를 두었다. 박 회장은 ‘비타500’ ‘광동 쌍화탕’의 신화를 쓴 광동제약 고 최수부 회장과 공통점이 많다. 두 사람 모두 피눈물 나는 시련 끝에 오늘의 기업을 일군 입지전적 인물이다. 학력은 초등학교가 전부이고, 산에서 나무를 베다 2시간 넘게 읍내까지 걸어 나가 팔았다. 그런데 박 회장은 한 술 더 떠 한쪽 눈마저 보이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왼쪽 눈이 떠지지 않았어요. 눈동자는 멀쩡했지만 눈꺼풀이 올라가지 않았던 겁니다. 어머니가 혀로 핥고 손으로 만져주고 젖으로 닦아도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어린 박경진은 가난뱅이 머슴의 아들에다 눈까지 안보여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심지어 친형으로부터도 ‘눈찌그리기’라는 말을 듣는 등 서러운 시간을 보냈다. 그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은 건 신앙의 힘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우연히 서울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학교에서 예배 보는 모습을 보았다. “그 사람들은 피란생활이 어려울 텐데도 기뻐하며 노래를 불렀어요. 목사님이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떠나지 않으십니다’는 말을 듣고 나도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었어요.” 박 회장은 그 일이 있고부터 동네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몸이 힘들고 고단해도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았다. 밥을 굶더라도 감사헌금만은 꼬박꼬박 내는 신앙생활을 현재까지 해오고 있다. 박 회장은 결혼 후 서울로 올라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청량리 쌀가게에서 쌀을 날랐고, 길거리에 자판을 깔고 양말과 내의를 팔았다. 리어카에 주방기구를 싣고 밤늦게까지 거리를 돌아다녔고, 가난한 산동네의 우물 파는 노동도 했다. 문패 없는 집을 찾아다니며 문패를 주문받아 팔던 중 자그만 캘린더 제조업체가 내건 영업사원 모집 광고를 보았다. “캘린더 영업으로 석 달 만에 쌀 20가마 정도의 돈을 벌었어요. 갑자기 부자가 된 느낌이었지요. 판매방식은 간단했어요. 달력을 팔 집에 가서 그들의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바쁜 시간이 끝난 밤 11시쯤 되면 주인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그들 대부분은 나에게 주문을 주었어요.” 박 회장은 1979년 종로3가에 7평짜리 사무실을 임대해 ‘진흥문화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1983년 유럽의 기독교 문화유적지를 돌아보다가 사업 아이템을 얻었다. “기독교 문화와 관련된 책, 그림, 슬라이드, 팬시용품 등을 사가지고 한국에 돌아와 그걸 토대로 화가에게 의뢰해 6장의 성화를 그려 성화캘린더를 만들었어요. 당시 잘 나가는 캘린더가 보통 2만부였는데 이 캘린더는 자그마치 53만부가 팔렸어요.” 성화캘린더로 회사 규모가 커지고 사원 수도 늘었다. 1989년 서울 신설동에 사옥을 지었을 때는 사원 수가 100명으로 불어났다. 오프셋 인쇄기와 제본기 등 인쇄시설도 갖추었다. 하지만 늘 잘 나가지만은 않았다. 화재로 건물 일부가 불에 타는 사고가 있었고, IMF 때 구조조정의 위기도 맞았다. 이 때 사원들이 10% 급여 삭감을 감수하는 의지를 보여 한 사람도 내보내지 않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승용차를 팔아 직원들에게 설날 상여금을 지급할 정도로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곧 정상화가 될 수 있었어요. 수억원의 어음부도가 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은 마치 어른이 아이의 손을 잡고 인도하듯이 제 손을 붙잡고 이끌어주었습니다.” 박 회장이 사업과 함께 10년 이상 해오는 봉사활동이 크게 두 가지이다. 해외입양아 초청 모국 방문 행사와 한카문화교류협회 일이다. 해외입양아의 경우 18년 동안 약 400명이 다녀갔다. 조국을 모른 채 자란 그들에게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 오늘날 세계 경제력 12위 국가로 성장한 조국의 모습과 역사, 문화 등을 알게 해 정체성을 갖고, 조국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해오고 있다. 지난 6월, 노르웨이·덴마크·호주·미국 등지에서 16명의 입양아가 박 회장의 초청을 받아 한국에 들어와 전국의 유적지와 산업시설을 돌아보고 돌아갔다. 작년의 경우 27명이 왔다. 이때 박 회장은 5000여만원의 자비를 쓰기도 했다. “교회 지인들의 집에서 홈스테이하면서 가정문화 체험도 하고 지하철도 타보게 합니다. 우리회사 직원이 행사를 진행하기도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입양아가 수년째 찾아와 자원봉사를 하기도 해요.” 요즘은 한카문화교류협회 주최로 캐나다 수도 밴쿠버에서 열리는 한국·캐나다 수교 50주년 기념행사 준비에 정신이 없다. 한카문화교류협회는 1999년에 생긴 민간단체로 박 회장은 현재 7대 회장을 맡고 있다. 올해는 두 나라가 수교 50년을 맞는 해이자 정전 50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해이기도 하다. 지난 7월 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정운찬 전 국무총리, 정근모 전 과기처장관, 데이빗 채터슨 주한 캐나다 대사가 참석한 가운데 수교 50주년 기념대회를 성대하게 치르기도 했다. “캐나다는 6·25 때 자국 병사 2만7000명을 보내왔어요. 그 수는 당시 캐나다 전군의 절반이었다고 해요. 만약 우리나라 전쟁에서 그들이 모두 전사했다면 어떻게 됐겠어요. 캐나다는 오늘의 우리나라가 있기까지 정말 도움을 많이 준 혈맹국입니다.” 그는 오는 9월 16일부터 24일까지 8박9일 동안 밴쿠버에서 가면 퍼레이드를 비롯해 수교 50주년 기념 사진전, 음악공연 등을 펼친다. 일제 강점기에 고종 황제 주치의, 독립운동, 농촌계몽 등으로 한평생 헌신한 올리버 R. 에비슨, 프랭크 W. 스코필드, 맥켄지 등 캐나다 선교사 7명의 얼굴을 본떠 만든 가면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그들의 행적을 기록한 피켓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면서 두 나라의 우의와 미래 동반자 관계를 널리 알리는 행사이다. “추석 명절에 우리는 좀 뜻 깊은 일을 하자는 마음으로 준비를 하고 있어요. 마침 캐나다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는 교포 한 분이 이번 행사를 전해 듣고 기부할 분을 소개해주었어요. 홍콩에서 사업하는 분이 2만달러를 당장 우리 통장에 넣어주겠다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어요.” 박 회장의 굴곡진 삶에서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가슴에 절절히 남아 있는 일이 무언가 물었다. “내가 21세에 한쪽 눈을 떴어요. 나보다 세 살 어린 여동생이 오빠 눈을 뜨게 해주겠다면서 서울로 올라가 메리야스 공장에서 공순이로 일하며 억척스럽게 돈을 모았어요. 여동생과 함께 서울의 병원마다 찾아다닌 끝에 이필웅 안과에서 수술을 받았어요. 눈동자는 정상인데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신경이 죽어 떴다 감았다 하는 게 안 된 겁니다. 다른 데 살을 떼다가 이마의 신경과 연결해 이마 근육의 움직임으로 눈꺼풀도 따라서 움직이도록 하는 수술을 받았어요. 그래서 잘 때도 이쪽 눈은 조금 떠 있는 상태예요. 그런데 여동생이 내가 군복무를 하던 어느 날 실종됐어요. 6개월 후에 동생의 주민등록증이 우체통에서 발견됐어요. 그 후로 생사를 모릅니다. 8년 후 돌아가신 어머니 속옷 주머니에 내 동생의 조그만 사진이 들어 있는 걸 발견했어요. 남들이 안 보는 데서 어머니가 동생 사진을 들여다보신 거지요. 지금이라도 살아 돌아온다면 내 전 재산의 반을 뚝 잘라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박 회장은 지금도 하루에 잠을 4~5시간밖에 자지 않고 공부를 한다. 기독교신문에 한국교회사에 관한 칼럼도 연재한다. 박 회장은 유신교회 유인상 목사의 도움으로 1982년 2월, 감리교 총회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늦은 나이에 공부를 하지 못한 한을 풀기도 했다. 협성대학에 들어가 젊은이들과 함께 공부했고, 서울시립대경영대학원도 수료했다. 그는 “배우지 못한 내가 많이 배운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니 어떡하겠어요.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요”라며 웃었다. “나도 늙어가지만 난 늙었다는 생각을 안 해요. 우리나라 노인들 말입니다, 노인 행세 그만하고 더 늙기 전에 좀 건강하게, 뭔가 바람직한 일을 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오늘 아침 집사람에게 ‘난 자식들하고 한집에서 살고 싶다’고 했어요. 자식들에게 내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좀 보여주고 싶어서요.” 박경진 회장은 우리나라 17개 교단, 22만여 한국장로들의 연합기관인 한국장로회총연합회의 33대 대표회장이기도 하다. 그는 “대표 회장은 벼슬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에요. 우리나라 교회가 사회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시대요. 옛날에는 기독교라면 사람들이 한수 위로 알고 신뢰와 존경을 보냈지만 요즘은 기독교라면 맨날 싸움질하는 것으로 보잖아요. 이런 시대에 우리가 정신 차려서 화합하고 협력하는 교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박경진 회장 약력 1940년 충남 서산 출생 협성대 졸업 서울시립대경영대학원 수료 감리교 총회신학교 졸업 진흥문화(주) 회장 한국기독교출판협회 회장 (사)한카문화교류협회 회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회장 한국장로회총연합회 대표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