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 서재필박사의 한국사랑에 대한 책 출판준비 대담프로
2009. 8. 4. 진흥 아트홀. 대한독립의 아버지 서재필 출판을 준비하면서 한국교회사학자 두분을 초대하여 대담을 하였다. 우측으로 부터 윤춘병, 김수진, 박경진
서재필은 1864. 1. 7.이유원의 둘째 아들로, 전남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이기대의 집에서 그의 외손자로 태어나다. 서재필은 칠촌 서광하의 양자로 대덕군에 갔다가. 다시 서울 외삼촌에게서 공부하며 성장하다. 그의나이 18세에 장원급제, 23명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 그가 19세때 청년 16명을 이끌고 일본에 갔다. 서구문화를 받아드려 우편, 철도, 전신전보 등 눈부신 발전을 이룬 것에 도전받고 조국의 자주독립의 중요성을 인식한다.
그가 1884년 7월 13개월의 일본훈련을 마치고 돌아와 12월 4일 갑신정변의 개화당으로 주도적 역할을 하여 병조참판의 직을 가지지만 개혁의 준비가 엉성하여 삼일 천하로 막을 내린다. 서재필,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 개화당 주동세력은 일본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1885. 5. 26 서재필, 서광범, 박영효 등은 루미스선교사의 소개장을 들고 미국으로 다시망명길에 오른다. 1892년3월 미국에서 피눈물나는 고생끝에 한국인 최초 의학사 학위를 취득한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미국에서 시민권을 가진 그가 박사가 되어 조국의 장래를 위하여 고난을 무릅쓰고 돌아와 1896년 초부터 2년 4개월 동안 조국에서 독립신문을 간행하여 대내적으로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고 개혁을 독려하였으며 대외적으로 국권회복과 조국의 자주독립에 온 힘을 쏟았다. 독립신문은 많은 백성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한글로 띄어쓰기를 하여 만들었으며 신문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여 여론을 조성하고 정치개혁을 이룩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논설을 통해 애국애족과 여성 해방의 필요성, 위생관념, 도로와 철도의 필요성 등 미국에서 본 것을 토대로 현대화를 위해 개혁할 모든 분야에 대해 강조했다.
서재필은 1896년 5월 21일부터 매주 목요일 오후 3시에 아펜젤러 선교사가 세운 배제학당에서 강좌를 열어 학생들에게 세계지리와 역사 그리고 정치학을 가르쳤다. 인권과 자유, 평등과 민주주의에 대한 강의는 젊은 학생들에게 놀라움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향해 눈을 뜨게 했다. 이 가운데 서재필의 가르침을 받은 이승만은 훗날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 그리고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의 조직화를 도모하였고 그는 갑신정변의 실패를 교훈삼아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닌 밑으로부터의 실질적인 개혁을 위해 국민계몽과 사회개량운동에 역점을 두게 되었다. 즉 민족주의와 독립국권의 확보, 민주주의의 도입과 사회개혁이 그의 실천적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개혁과 민주주의, 독립 국권을 부르짖는 그에게는 시시각각으로 생명의 위협이 가해짐으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독립운동
그는 다시 미국에서 사업을 벌이고 1919년에는 종업원이 50명이나 되는 큰 사업체가 되었다. 그렇게 활발한 사업경영을 하면서 1919-1922까지 4년 동안 서재필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몸을 던져 일했고 시간과 재산을 모두 바쳐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자하고 희생하였다. 4년 동안 미국에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하여 쓴 돈이 8만 달러나 되는데 지금의 가치로는 100만 달러가 넘는 큰돈이었다.
통일조국을 보지 못한 채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일하기 위해 모두 조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서재필은 움직이지 않고 미국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조국은 신탁통치 문제로 분열되었고 날이 갈수록 정국은 더욱 혼란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서재필 박사는 어려운 정국을 수습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고 김규식 박사가 주동이 되어 서재필의 귀국을 추진하였다. 1947년 3월, 서재필 박사는 워싱턴에서 조선 주둔군 사령관인 하지 장군을 만나 이야기 끝에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다.
1947년 7월 1일 오후4시. 서재필 박사는 49년 만에 미 군정청 최고고문 겸 과도정부 특별의정관 자격으로 인천항에 도착했고 각계 대표와 국내외 기자단과 친척들과 수많은 군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7월 12일 오후 1시에는 환영준비 위원회 주최로 서울운동장에서 환영대회가 크게 열렸고 각 사회단체, 회사, 공장, 관공서, 학생, 동회 단위로 모인 군중들은 조국의 개혁과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송재 서재필 박사의 공적을 찬양하며 진정으로 감사했다. 자기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것을 알고 크게 놀랐으나 서재필 박사의 관심은 첫째도, 둘째도, 오직 나라 생각뿐이었다.
1948년 5월 10일에는 남한, 8월 25일에는 북한에서 각각선거가 실시되어 조선은 남북으로 갈리고 말았다. 통일 조국을 염원하던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1948년 9월 11일 아침. 둘째딸 뮤리엘과 비서인 임창영 박사와 함께 숙소였던 조선호텔 문을 나섰다. 수백 명의 환송객이 나와 다시는 보기 어려운 84세의 위대한 애국자를 눈물로 보냈다. 미국에 돌아온 서재필은 미디아의 병원 문을 다시 열고 의사로서 진료를 계속하다가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한국전쟁 소식을 들은 그는 그만 큰 충격을 받았으며 점점 건강이 나빠져서 병석에 눕게 되었다.
송재 서재필박사의 위대한 삶
1951년 1월 5일, 서재필 박사는 향년 87세의 일기로 필라델피아 근교에 있는 몽고메리 병원에서 조국을 염려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조국의 개혁과 자유와 독립을 위해 자신과 가족과 시간과 재산을 모두 바쳐 희생한 서재필은 위대한 애국자였고 혁명가이자 선각자였다. 그의 업적은 청사에 길이 빛나고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서 기억되어야 하지만 그는 지금 아무도 찾지 않는 국립묘지 한 구석에 외롭게 잠들어 있으며 그의 평생, 나라와 민족의 혼을 일깨우며 사랑했던 그 빛나는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전남보성에 그의 생가 복원과 함께 건립된 “송재 서재필박사 기념공원” 은 개원도 하지 않은 채 관리자도 없이 방치되어 있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의 희생정신과 애국 애족활동을 본받아 우리가 살고 있는 이땅과 나라와 민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한국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진흥홀리투어 박경진)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연21회동창회 인천투어 (0) | 2009.12.07 |
---|---|
사랑하는 친구 유재승 박사의 가업승계 (0) | 2009.11.27 |
수화뮤지컬 선교회 (0) | 2009.09.27 |
[2009.5.23] 노무현 대통령 유서 (0) | 2009.08.06 |
[2009.8.1] 광화문광장 개방 (0) | 2009.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