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교동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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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유배지로 잘 알려져 있는 교동도는 기독교 유적지로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교동도는 서울에서 48번 국도를 타고 강화도를 가로질러 창후리 선착장에 도착하여 다시 배편을 이용해서 들어가야 하는 ‘섬 안의 섬’이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북한의 해주에서 교동도를 거쳐 강화도와 인천으로 사람과 물자가 드나드는 교통의 요지였다. 그래서 다른 지역보다 교회가 일찍 세워진 역사를 가지고 있다. 창후리 선착장에 내리면 1990년에 새로 지은 교동교회 건물이 보인다. 그리고 교동교회에서 오른편으로 나 있는 길에 접어들면 상룡리 옛 교동교회를 만날 수 있다.
1933년에는 권신일의 영향을 받은 이들 중 상용리의 박성대와 박형남 부자가 땅을 기증하여 건축된 상용리의 새 예배당으로 옮겼다. 한편 이들 박씨 집안의 박기만은 교동교회에 밭을 기증하였고, 또한 그의 아들은 일제시대에 한글 점자를 창안하고 맹인교육에 헌신하여 ‘맹인의 세종대왕’이라 칭송받는 송암 박두성이다. 교동교회는 해방 후 난정교회(1949)와 교동중앙교회(1952)를 분립시키며 성장을 거듭하여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교동에 설립된 12개 교회의 '모교회'로서 권위를 유지하였으나, 1979년 교인들이 분열되어 일부가 대룡리에 교동제일교회를 설립하면서 나뉘어졌다. 그러다가 1990년부터 통합을 결의하며 화합의 장을 모색하고 있다. 현재 교동도에 있는 기독교유적은 1933년 지어진 옛 교동교회가 유일하다. 1990년대 중반까지 담임교역자를 모시고 예배를 드렸으나, 주민들의 이주 등으로 지금은 기도처로, 그리고 옛 교동교회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곳으로 관리되고 있다. 예배당은 처음의 초가지붕을 1970년대에 푸른색 양철지붕으로 바꾼 것 외에는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예배당 앞에 서 있는 종탑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종탑의 종과 관련하여 일제시대 때 전쟁에 군수물자로 쓰려고 배에 싣고 가던 중 큰 파도를 만나 도로 제자리에 걸어놓았다고 하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한편 1991년 교동교회 박용호 권사가 양어장을 만들 계획으로 옛 교동교회 예배당 맞은편에 시추했는데 이곳에서 뜨거운 온천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온천수가 칼슘성분이 많아 아토피를 비롯, 신경통, 관절염에 효력이 있어 온천장으로 개발되었다. 처음에는 베데스다 온천이라고 했으나 물맛이 짜고 써서 1994년부터 출애굽기에 나오는 ‘마라의 쓴물’(출15:23)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마라 쓴물 온천장‘이라 명명했다. 2000년 강화본도의 창후리로 옮겨 현대적 시설로 개장하였으며 교동도에 있는 원래의 ‘마라 쓴물 온천장’에서 물을 길어 강화본도로 나르고 있다. 교동도는 작은 섬이지만 일찍 복음이 들어와 축복의 땅이 된 곳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순수한 신앙과 전도열정을 오늘의 한국교회가 본받아 다시금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길 기대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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