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천사원』사원예배 설교 (11.2.9)
☀ 성경: (요한 9: 1~3) ☀ 제목: '오직 감사'
『은평천사원』에 오니까 모든 분들의 얼굴이 밝고 환해서 모두 천사들 같습니다. 반세기이상을 『은평천사원가족』과 고락을 함께해 오신 조규환 원장님과 천사원 가족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항상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진흥문화주식회사의 설립자이며, 왕십리감리교회를 섬기고 있는 박경진 장로입니다.
얼마 전에 저희 교회 새로 오신 김성복 담임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왕십리에 대하여 말씀을 하셨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를 송학에서 한양으로 옮기기 위하여 무학대사를 보냈습니다. 왕십리언덕에서 잠시 쉬면서 보니 경관이 수려하고 좋아서 "아아! 여기에 도읍지를 정하면 좋겠구나."하면서 둘러보는데, 소를 몰고 가는 한 촌로가 보였습니다. 노인은 소에게 매질을 하면서 "이랴! 이놈의 소가 무학이처럼 멍청하여 분별을 못하는구먼, 쯧쯧쯧~" 했습니다. 무학대사는 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촌로를 불렀습니다. "여보시요! 무학이가 멍청하다는 것은 어찌 그리 잘 아시오?" 하고 물으니, "글쎄요, 풍수지리도 볼 줄을 모르니 멍청한 거 아닙니까?" 하였습니다. 무학대사는 범상치 않아 보이는 그 촌로에게 넙죽 절하며, "아니, 실은 내가 이곳에다가 한양도읍지를 정하고자 하는데, 그럼 더 좋은 곳이 어디입니까?" 물으니, 노인은 "에잇 참! 저 북쪽으로 십리만 더 가보슈." 하고 내 뱉듯이 말하고는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왼뺨을 치거든 오른뺨을 돌려 대주고, 누가 억지로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라고 하셨습니다. 10리를 더 가주는 믿음, 그것이 곧 왕십리인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양보하고 배려하며 감사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10리를 더 가주는 여유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가 소경으로 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십니다. 그것이 때로는 고난일 수도 있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일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인내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우리에게는 오직 감사만 남는 것입니다.
저는 날 때부터 눈이 하나였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10남매를 낳으셨는데 그 중에 아홉 번째로 태어났습니다. 10남매라 해도 하나도 놀라지도 않네요. 아무튼 애기를 낳아놓고 보니까 두 눈이 아니고 글쎄 눈이 하나인 것입니다. 하나는 감겨 있었습니다. 눈꺼풀이 올라가지를 않는 거예요. 어머니가 아무리 침을 바르고 눈꺼풀을 올려보아도 그냥 덮여 버리는 거예요. 어머니는 날마다 시도 때도 없이 장독대에다가 찬물(정한수)을 떠 놓고 빌었습니다. 삼신 할머님! 삼신 할머님! 그저 이년에게 천벌을 내리시고 우리아들 눈 뜨게 해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습니다.
이처럼 저는 태생에 눈이 하나밖에 없는 장애자였습니다. 자라면서 눈 째그랭이, 반쪽, 50%, 한 달에 보름밖에 못 보는 놈, 이러한 놀림을 받으며 창피하고 부끄러운 열등감 속에서 자랐습니다. 동무들도 없이 혼자 놀 때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스물 한 살 까지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가서도 동무가 없는 거예요. 두 눈 가진 애들끼리 놀고 항상 왕따, 외톨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1학년 때 시험을 쳤는데 모두 100점을 맞았습니다. 그때부터 친구가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반장도 내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늘 눈이 하나여서 창피하고 부끄러웠습니다. 공부를 잘해도 내게 있는 열등감 때문에 늘 머리를 수그리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성장하던 초등학교 1학년 때 6.25전쟁이 났습니다. 그해 겨울 1.4후퇴로 피난민들이 우리학교로 피난보따리를 들고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춥고 배고픈 그 피난민들이 교실에서 찬송을 하며 예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한번 가보자.'하고 참여했던 것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보니 희망이 생겼습니다. 마음 가운데 예수가 찾아오시니 용기가 생기고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늘 고개를 수그리고 다니던 것이 이제는 당당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는 희망이요 기쁨이었습니다. 놀리거나 말거나 왕따를 시키거나 말거나 이제는 부끄러움도 없어졌습니다. 창피한 것도 상관없었습니다. 내 속에는 예수가 있는데 부족할 것이 없었습니다. 할렐루야!
6학년까지 반장은 혼자 하였습니다. 공부는 항상 일등만 하였습니다. 이거 여러분한테 제 자랑하려고 그러는 거 아닙니다. 나타내려고 그러는 거 아닙니다. 예수가 함께하시면 만사가 형통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삶 속에서, 그저 오직감사 뿐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저는 예수로 만족하였습니다.
제가 19살 때 세례를 받았습니다. 침례교선교사 두 분이 와서 부흥회를 하고 마치는 날이 11월 1일 날이었는데 개천에 가서 침례로 세례식을 하였습니다. 곽영찬 담임전도사님이 개천가에서 안내하는 대로 돈-라이스 목사, 하가 선교사가 양쪽에 서서 팔을 잡고 물에 퐁당 넣으며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그때 물속에 들어가면서 나는 인간적인 열등감에 사로잡힌 박경진은 죽고 성령으로 새사람 되어 물속에서 올라오면서 확실한 성령의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날부터 달라졌습니다. 철야기도, 새벽기도, 금식기도, 등 물불을 가리지 않고 교회 일에 충성을 하였습니다. 워낙 열성적으로 하니까 권사님 속장님들이 금방 속회인도자로 세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20대 초반에 속회인도자가 되어서 설교하고 예배인도를 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여전히 눈은 하나였습니다. 스물한 살 까지 눈이 하나였습니다. 여전히 50%인생이었습니다. 그래도 주일학교교사, 속회인도자, 교회예배설교 등 청년시절에 다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하여 세우시는 놀라운 은혜요 축복이었습니다. 그때 주일학교 학생들이 지금은 훌륭한 장로로, 혹은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감리교목사님1명, 장로교목사님2명 등 3명이나 목회를 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가 함께 계시면 겁날 것이 없습니다. 어떠한 시련과 역경이 와도 예수가 함께 계시면 겁낼 것이 없습니다. 내가 두 눈을 가지고 태어났으면 아마 지금 예수도 안 믿고 어디서 어떻게 살아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함께 하시므로 시련과 역경을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감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예수 믿게 하시고 21살에 눈도 이 정도로 고치게 하시었습니다. 저는 군대도 36개월을 잘 마쳤습니다. 100%인생으로 바꿔주셨습니다.
여러분 50% 같으면 군대 갈 수 있습니까. 훈련소에 딱 들어갔는데 군대의 군기 여러분 무섭습니다. "앉아 일어서! 요것들 봐라 눈동자 돌리는 소리가 난다. 좌향좌! 우향우!" 하면서 들볶는데 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런데 첫날 식사배식 딱 해놓고 나니까 내무반장 장호만 하사가 군기 잡는 일장연설을 하더니, "자, 이제 식사개시하면 밥을 먹고 식기를 가지고 500M 전방의 세척장에 가서 식기를 깨끗이 닦아다 정돈하는데 까지 시간은 딱 3분이다. 시간오버하면 기압이다. 알겠나?" 그런데 "잠깐!" 하더니, "여기 어떤 놈 기독교인 있으면 기도 한번 해봐라!" 그 살벌한 상황에서 감히 누가 나서서 기도 하겠어요. 그런데 그 어떤 놈이 바로 나다 하는 심정으로 내가 벌떡 일어나서 큰 목소리로 “하나님! 나라에 부름 받은 젊은이들이 여기 모였습니다. 충성스런 군인이 되도록 오늘부터 훈련을 잘 마치게 하옵소서. 예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렇게 대표기도를 한 후 그 무섭고 악랄한 내무반장 장호만한테 날마다 매를 맞고 발로 채이고 정신없이 훈련을 받는 데서도 나는 한 번도 안 맞았습니다.
맨 주먹으로 철거민촌에서 시작한 서울생활은 10여 년 동안 피나는 고생을 하였습니다. 이사를 25번이나 옮겨 다녔습니다. 철거민촌 살림살이는 이삿짐도 없습니다. 이불보따리, 간편한 주방도구 산동네에서 다니는 이삿짐은 손으로 들어 나르는 정도였습니다.
감사한 것은 저의 한춘자권사가 나보다 신앙도 좋고 살림꾼입니다. 그렇게 여러 번 이사를 다녀도 이삿짐 옮기면서 싸움을 한 번도 안 했습니다. 그것은 저의 부부의 약속이요 맹세였습니다. 철거민 촌에서 사는 사람들 치고 구멍가게에서 외상질 하지 않는 집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이삿짐 싸놓고 가겟집과 싸우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로 외상질 하지 말자. 없으면 깨끗이 앉아서 굶어죽어도 외상질은 하지말자고 굳게 맹세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이 굶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녀들을 위하여 교육보험을 들어서 그것으로 학자금에 크게 도움을 입었습니다.
한번은 이사한지 며칠 안돼서 오후에 집에 돌아오는데 막내가 아이들끼리 소꿉놀이를 하는데 어른들을 흉내 내면서 "놀다가세요, 쉬어가세요, 재밌어요."하는 겁니다. 저는 깜짝 놀라서 孟母三遷之敎를 머리에 떠 올리며 당정 주인한테 말하고 이사를 하였습니다. 두 주먹 쥐고 무작정 상경하여 철거민촌에서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며 고생하였지만 이렇게 자녀교육을 다 잘 하게 하시었습니다. 큰 딸은 협성대학, 큰아들은 중앙대학마치고 미국유학을 거쳐서 진흥의 사장을 하고, 작은아들은 연세대학교, 전액장학금입학을 하였습니다. 학원걱정은 한 번도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키워 주셨습니다. 날마다 붙잡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3남매가 각각 사업을 하나씩 맡아서 사장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 왕십리교회 권사로, 집사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자녀교육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셔야 가능합니다. 부모의 삶을 통해서 해야 됩니다. 말로는 되지 않습니다. 기도의 삶, 헌신의 삶, 진실의 삶, 말입니다.
그렇게 허리띠 졸라매고 고생하였으므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서 그것이 기반이 되어 방산시장 남의 사무실에서 혼자서 <진흥>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시작한 것이 점차 개인적으로는 그 어려운 데서도 신학공부를 하도록 여건과 형편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종로3가에 <진흥문화사>라는 간판을 걸고 사무실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원이 하나씩 둘씩 늘어나기 시작하여 지금은 100여명의 사원들이 캘린더 600만부 생산하는 큰 기업으로 성장하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줄로 믿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성하도록 채워 주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왕십리 감리교회 장로로 세워주셨고, 뜻하지 않게 장로회전국연합회 회장도 두 번식이나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하도록 하시고 잘 감당케 하셨습니다.
결 론
태생의 소경은 벌을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가지고 원망하고 실망하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피는 것이 오히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항상 감사할 조건을 찾으면 <오직감사>가 나옵니다. 몸이 아파도 심신이 괴로워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자 할 때 <오직감사>의 조건을 발견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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