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회 및 집회

동수교회 간증집회(10-10-24)

박경진 2010. 10. 25. 15:10

           인천   동수감리교회 저녁예배 간증설교

동수교회는 내가 처음예수믿고 섬기던 모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시무하시던 주봉택목사님이 1972년도에 인천에 오셔서 개척하여 설립된교회이다.

황무지와같은 곳에서 어렵게 시작된 교회가 이제는 인천지역에서 대교회로 성장하였다. 저녁예배시간에도 그 넓은 예배당이 보기좋을정도로 꽉 차는데 특히 젊은이들이 많이 참석하여 미래가 밝은 교회로 인상이 깊었다. 말씀을 사모하는 신앙의 태도가 더욱 밝은 미래를 보여주는듯 하였다.

 

    박경진 장로 : 동수교회 간증설교 (10. 10. 24. 17시) 성경: 요한복음 9: 1~3  제목: 주제넘은 꿈

 

  예수께서 길 가실 때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난치병은 죄의 대가라고 생각했습니다. 태생의 소경이니까 필경 부모의 죄의 대가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고난을 당하면 죄의 대가가 아닌가 싶어 고민을 하게 됩니다. 사업실패, 교통사고, 가정의 우환, 돌발적인 사고를 당하면 누구나 당황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것은 죄의 대가가 아니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태생의 장애자

우리 아버지는 평생을 머슴살이를 하셨고, 어머니는 자녀를 열 남매 낳으셨습니다. 그 중에 제가 아홉 번째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낳고 보니 장애자였습니다. 눈이 한쪽만 떠지고 한쪽은 감겨져 있었습니다. 눈을 하나만 가지고 20살까지 장애자로 성장을 하였습니다. 한편 어머니는 나를 낳을 때의 서글픈 사연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산파도 없이 해산하고 혼자서 이발로 탯줄을 끊고 산후 처리를 혼자서 하셨습니다. 그리고 첫국밥을 지어 먹으려고 부엌에 가보니 쌀은커녕 보리쌀 한 톨도 없었습니다. 먹을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양지바른 보리밭에 나아가 누릇누릇 익어가는 보리이삭을 자르기 시작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먹을 것을 달라고 쫓아다니며 졸라댑니다. 그 서글픈 사연은 말로다 어찌 표현이 가능 하겠습니까? 그렇게 보리이삭 잘라다가 솥에다 쪄서 비벼서 알갱이를 다시 볶은 다음 맷돌로 들들 갈아서 죽을 쑵니다. 그것이 지금 같으면 얼마나 고급 웰빙식이 겠읍니까? 그러나 당시의 산모에게는 입에 맞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린애기 때문에 먹고 젖을 내 주어야 했으니 배고픈 설움을 말로다 어이 하겠습니까. 저의 어머니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장애자의 왕따 외톨이

나는 태생에 장애자이니까 처음부터 놀림감이었습니다. 동무들이 놀려댑니다. 외눈백이, 애꾸눈, 반쪽, 50%, 한 달에 보름밖에 못 보는 놈, 등으로 놀려대고 왕따를 당하며 수치심과 열등감 속에서 성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반쪽 50%인생이 공부는 내내 1등만 하였습니다. 21살 때 비로소 서울에 와서 눈 수술을 하고 지금상태로 고쳤습니다. 이제 50%를 면하고 놀림감에서 벗어났습니다. 한 달에 보름만 본다는 소리를 안 들어도 되었습니다. 아마 어려서 두 눈으로 고쳤다면 다른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나 되게 하시기 위하여 스무 살 까지 한눈으로만 두셨나 봅니다. 


아버지의 운명론

아버지는 늘 주제파악을 해라, 주제넘지마라, 분수에 맡게 살아라. 분수도 모르는 놈, 등으로 팔자에 타고난 대로 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무식해도 국어와 수학은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국어-주제, 수학-분수) 아버지는 나를 열 남매 중 아홉 번째로 낳았으니 아마 많아서 있으나 마나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 되는 것은 내 출생신고를 16세가 되어서 내가하였습니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 호적초본 떼러 면에 가보니 형 다음에 동생만 있고 중간에 나는 빠져 있었습니다. 집에 와서 아버지께 왜 나는 호적에도 없느냐고 했더니 아버지는 구장에게 말하기를 "나 막내로 아들을 낳았으니 호적에 올려주소." 하니까 이름을 뭐라고 합니까? 그래서 올해가 무신년이냐 물으니 경진 년이죠. 해서 그럼 경진이라고 하라 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름은 지어졌으나 구장이 누락했었습니다. 장애자로 태어났으니 내 운명이야 뻔했습니다. 그래서 주제넘지 말고 분수에 맡게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10살 때 초등학교 입학 할 때에도 그까진 놈 공부는 해서 무얼 하느냐, 소 깔이나 베어 먹이게 놔 두어라. 고 하였는데 큰 형님이 나를 억지로 초등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내가 그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것이 내 운명이었습니다. 그것이 내 주제였고 그것이 내 팔자였습니다. 나는 그렇게 태어나고 성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왕십리교회 장로, 장로회전국연합회 회장, 사단법인 기독교출판협회회장, CBS기독교방송국재단이사, 각 단체 회장 이사장만 해도 열개이상 맡아서 감당하고 있는 것 모두가 하나님의 작품인 줄로 믿습니다. 분명히 주제를 뛰어넘은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주제를 뛰어넘은 많은 얘기를 오늘 다 간증할 수는 없고 제가 쓴 책에 많은 기적의 체험을 기록하였습니다. 자녀들, 특별히 오늘날 힘들면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고 낙심하기 쉬운 젊은이들에게 대단한 용기를 북돋우는 필독서가 될 것입니다. 이 책은 한번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보고야 마는 책입니다. 이 책을 전도용으로 많이 구입하시면 제가 하고 있는 장학재단에 후원하는 게 됩니다.


피난민이 전한 복음

저는 1/4후퇴 피난민들이 학교교실에 몰려와서 예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춥고 배고픈 사람들의 찬송과 절규하는 기도의 부르짖음은 내 심금을 울렸습니다. 의미를 찾으며 참가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복음을 받아드리고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장애자라고 놀리고 왕따 시키든 것도 이제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예수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예수만 붙들었고 예수로 만족했습니다. 한 달에 보름밖에 못 본다고 놀려대는 것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예수가 내 주인이시니 주인이 알아주시면 그만이었습니다. 주일학교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1959. 11. 1 나는 세례를 침례로 받았습니다. 침례교 선교사님이 성연교회에 와서 부흥회를 하고 마지막 날 새벽집회를 마치면서 냇가에 가서 전교인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물에 들어가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하면서 물속에다 잠갔다가 꺼내는 식으로 침례가 진행되었는데 죽었다가 살아난 느낌이었습니다. 새 사람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의 확증이 생겼습니다. 금요일 저녁은 반드시 금식을 하였고 매일 새벽기도를 하면서 겨울에도 얼음을 깨고 몸에 찬물을 끼얹고 냉수마찰을 하였습니다. 토요일이면 철야기도 주일아침은 주일 성수를 위하여 반드시 금식을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50년 이상 새벽기도는 아예 생활화가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자립(홀로서기)

나는 성연교회에서 주봉택목사님을 담임목사님으로 모신지 5개월 만에 성연교회를 떠나 24세 때 청년혼자서 자립하여 야산5,000평을 일구어 밭을 만들어 경작하는 영농 인으로 나갔습니다. 잠을 안자고 일했습니다. 새벽기도마치면 들에 나가서 개똥 소똥을 한 짐씩 주어다 놓고 내 손으로 아침밥을 해 먹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하기 실어하거든 먹지도 말라는 말씀은 반드시 실천하였습니다. 그렇게 독신으로 개간사업을 하는 것은 정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일이었습니다.


놀라운 일은 내가 대산교회로 갈 때 그곳 담임목사님댁에는 손님이 와도 국수 한 그릇 대접할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면서 제가 사는 동리 청년들을 10여명 몰고나가고 그들이 또 자기친구들을 전도하여 갑자기 사람들이 모이며 웅성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마침 영탑리 교인가정에 초상이 났습니다. 그렇게 열심하는 교인가정도 아니었는데 내가 박상호 전도사님께 말씀드려서 장례를 잘 치러 주자고 하였습니다. 서산제일교회가서 꽃상여를 빌려오고 내가 전도한 청년들을 동원하였습니다.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3일장을 치르는데 밤을 새워 꽃을 만들어 꽃상여를 잘 꾸며서 장례를 잘 해주기로 하였습니다. 이것이 소문나서 동리사람들이 총동원되어 구경 나오고 시골에서 대갓집 장례행렬같이 하였습니다. 교회는 조용하면 침체되고 자꾸 모여서 일을 하면 부흥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흥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때부터 대산교회가 부흥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방내에서 가장 어려웠던 교회가 갑자기 지방내에서 세 번째 가는 교회로 우뚝 올라서기도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하는 결혼

여러분 배필을 찾을 때 어떻게 구합니까? 저는 최초 맞선보러가면서 약혼반지 2.5돈짜리를 사가지고 갔습니다. 믿음으로 결정하고 가면서 아예 약혼식까지 하고 오려고 준비를 해가지고 갔습니다. 그것은 중매하는 양쪽교회 목사님과 전도사님을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규수가 처녀 집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처녀들 집사 시키는 일은 신중히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교회에서 처녀가 집사정도 되면 보지 않고 약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산에서 청양은 그 당시 교통수단으로는 하루 종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찾아가서 목사님 댁에서 규수를 처음 봤을 때는 마음속으로 기대한 이상형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중매하는 유영택목사님께서 서로 만나기전에 예배드리자고 하셨습니다. 그때 성경을 빌립보서 2장1~5절을 읽으셨습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의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은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속으로 내가 여기까지 와서 죄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이 있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고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게 상대가 반대해 주기만 바라고 내가 반대할 생각은 아예 접었습니다. 유영택목사님께서는 예배 마치고 두 사람이 예배당 안에 가서 대화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나의 자랑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한 점만을 생각나는 대로 다 털어 놓으며 고백했습니다. 삶의 환경에서부터 부정적인 면만 골라서 다 얘기하였습니다. 산간벽지 바닷가 외딴곳에서 광활한 개간지를 경작하는 고된 일만 하게 된다. 나는 군대를 안 갔으니 앞으로 군대 가게 되면 혼자서 3년을 살아야 한다. 부정적인 얘기를 다 했지만 그는 다 듣더니 하나님의 뜻으로 믿어야죠. 했습니다. 과연 처녀 집사다웠습니다. 나보다 믿음이 훨씬 좋은 사람이라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굳게 믿으며 자타가 공인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맨주먹으로 상경

저는 결혼하고 2년 후에 정말 군대 가서 만3년 만에 제대하고 시골 개간사업 하던 것은 이미 정리가 되었으므로 아예 고생을 하려면 넓은 데로 가자고 생각하고 이불보따리 메고 무작정상경하여 유인상전도사님댁 마루에서 서울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시골 촌놈이 서울에서 입에 풀칠하기 급급한 고생이었으나 고생스럽다고 신세한탄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오늘보다 내일을 위해서 꿈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노력했습니다. 한춘자권사는 매일 밤 담요 한 장 가지고 교회 가서 기도하는 것이 아예 일상생활 이었습니다. 오늘날 실업자가 많다고 뉴스거리입니다만 저는 그 실업자는 일하기 싫어서 실업자이지 정작 일이 없어서 실업자는 없다고 봅니다. 궂은일 안하고 내 맘에 꼭 맞는 일자리 찾으려니까 실업자입니다. 어디에서라도 일을 하겠다고 하면 일자리가 없어서 실업자가 아닙니다. 저는 철거민촌에 살면서 막노동 잡부일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일이 없어서 남의 공사 현장에 가서 하루 공짜 일을 해 주기도 했습니다. 1971년 1월이었습니다. 일터를 찾다가 전주심기위하여 땅을 파는 현장에 갔습니다. 열심히 일할 테니 좀 부쳐주십시요. 여보! 우리할 일도 모자라니 딴 데나 가보시오. 나는 오늘 어깨가 근질근질한데 땀이나 한번 흘려봅시다. 하고 곡괭이를 빼앗아가지고 하루 종일 땅을 팠습니다. 저녁때 반장이 와서 저 사람누구요! 어깨가 근질근질하다나! 하면서 공짜일 한 사람입니다. 그때 반장이 내일부터 나와서 일하라고 해서 몇 일간 밥벌이를 한 적이 있습니다.


유럽기독교문화체험

1983년도 기독교문화의 발상지 유럽을 갔었습니다. 마케도니아사람이 바울을 향하여 손짓한 것이 그렇게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다는 것을 참으로 놀랍게 느끼며 우리의 발걸음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의미 있게 생각했습니다. 그해 유럽견학을 통해서 받은 영향으로 뉴 디자인 캘린더를 제작했는데 놀라지 마십시오, 한 종목으로 53만부라는 대박을 터트렸습니다. 소득으로 말하면 그냥 갈퀴로 긁었습니다. 진흥이 비로소 캘린더업계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한 종목에 10,000부만 찍어도 괜찮은데 53만부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에피소드한마디를 추가 하겠습니다. 베를린 역 앞 호텔에서 빚어진 얘기입니다. 유럽 가서 촌놈이 일 저지른 얘기하나 하겠습니다. 나는 습관을 따라 새벽에 일찍 잠이 깨어 공동 샤워장으로 갔습니다. 화장실 안에서 간단하게 한사람이 들어서서 샤워하도록 커튼이 쳐져 있고 그 안에 사각으로 된 물통이 있었습니다. 나는 물통에다 샤워꼭지를 틀어놓고 물을 마냥 받아서 물통에 앉아서 비눗물을 밖으로 계속 퍼내면서 몸을 닦았습니다. 그런데 자꾸 문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무슨 말인지 모르게 자꾸 야단치는 듯 한 목소리였습니다. 그곳은 화장실과 겸하여 사용되는 곳이어서 누군가 급히 볼일을 봐야 하니 빨리 샤워를 끝내라고 독촉하는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잠시 후에 문밖에서 노크 하다가 소리치면서 안으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들어온 여자는 남자가 목욕하는 곳으로 겁도 없이 와서 커튼을 확 열어 젖혔습니다. 여자 앞에 벌거벗은 나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당황스러워하기 보다 나를 보면서 눈을 크게 부릅뜨며 호통을 쳤습니다. 나 또한 안에 뻔히 사람이 있는 줄 알면서 왜 들어왔는지, 그리고 왜 다짜고짜 화를 내는지 황당하기도 하고 어처구니없었습니다. 좀 심하다고 생각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니 벌거벗고 나서서 싸울 수도 없어서 마지막으로 물을 더 많이 떠 몸에 끼얹은 다음 서둘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날이 밝은 후 배실로암 선교사가 허둥지둥 난색을 표하며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내 손을 잡더니 3층, 2층, 1층까지 내려가면서 내가 묵은 방의 밑 호실을 모두 보여 주었습니다. 사태가 파악되면서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샤워 실에 쳐져 있던 커튼을 물통 안으로 집어넣어 바깥으로 물이 튀지 않도록 하고 샤워를 했어야 했는데 나는 오히려 물통 바깥으로 비눗물을 퍼내었으니…… 이미 목조건물인 호텔방이 완전히 수렁궁창이 되었고 침대와 방바닥은 물난리를 겪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묵은 방밑으로 3, 2, 1층까지 각 호실에 있던 투숙객들은 다 피신해 가고 없었습니다. 아예 사람이 들어 설 수도 없게 장마철 논바닥 같이 되어버린 카펫 트는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하수처리가 그렇게 되어 있는 줄을 전혀 알지 못했던 나는 문화를 모르고 여행경험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모르고 저지른 실수이기는 하지만 너무나 파장이 커서 여하간 변상의 책임을 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피해금액이 당시의 내 경제력으로는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지난다고 생각하니 아찔했습니다. 더군다나 국경을 넘어 배상책임이 떨어진다면 국위를 손상시킨 혐의로 형사상 책임을 질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보험처리가 가능한지 여부가 관건인데, 비가 새어서 난 손해라면 보험처리가 가능하지만 사람실수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두고 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어이없는 실수로 빚어진 일이 걱정되어 아침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때우고 호텔에다가 나의 인적사항을 자세하게 적고, 또 배 선교사는 독일 사람이었으므로 유일하게 보증을 섰습니다. 지배인한테 정말 미안하다고 사죄하면서 20불을 팁으로 건네주고 돌아서는데 기분이 영 찜찜했습니다. 나는 송충이라도 씹은 표정으로 호텔을 나왔습니다. 천만다행으로 그 사건 이후 26년이 지나도록 변상하라는 통지는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명심보감(明心寶鑑)』에 ‘한 가지 일을 경험하지 않으면 한 가지 지혜도 자라지 않는다.’고 하였듯이 그일 이후로 나는 외국을 다닐 때마다 문화적 차이로 인해 겪게 될지도 모를 일에 대하여 항상 보다 신중한 태도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런 실수를 한 번도 되풀이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 가운데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의 나타내시는 역사가 각각 다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려움이 있습니까? 심각한 고민으로 고난당하는 분이 계십니까? 병마로 고생 하십니까? 사업에 실패한 분이 계십니까? 잠 못 자는 고민에 빠진 분이 계십니까? 이 모든 것들은 죄의 대가가 아닙니다. 벌 받아서 그런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뜻이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느냐고 기도하며 묻고 오히려 감사할 조건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라고 하신 말씀이 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열등감을 뿌리째 뽑아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타고난 주제대로 살게 하나님께서 그냥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주제넘은 꿈” 을 주십니다. 뛰어넘을 힘과 용기를 그리고 상황과 여건을 반드시 주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사람 야곱이 그러했고 요셉이 바로 그런 꿈을 성취하였습니다. 바울이 그러했고 베드로가 자기주제를 뛰어넘어 꿈을 성취하였습니다. 우리주님은 능력 밖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은 한 달란트 받은 자가 한 달란트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을 꾸짖으시고 빼앗아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에게 주셨습니다. 감당할 능력 있는 자에게 더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한계를 미리 설정하지 말고 큰 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큰 믿음과 꿈을 가지고 “주제와 분수”를 뛰어 넘어 큰 꿈을 실현하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방성경 읽기, 암송 대회에서 우승을 한 아이들에게 상금과 표창장을 주학선 담임목사님이 축하하고 격려하면서 표창장을 수여하고 있다.

 

 

 청장년 선교회원들이 나와서 특별찬양과 율동으로 믿음으로 단합된 강한용사들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동수교회 청장년선교회원들의 특별찬양을 하고있다.

 

 

 동수교회 주봉택 원로목사님이 1963년 6월 23일 성연교회 담임하고 계실때 찍은 사진을 설명하고있다. 맨 뒷줄에 애기안고있는이가 박경진, 애기는 주학선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