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찌라도’ 감사 성경: (하박국 3장 17~18절)
몇 년 전에 소록도에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3박4일 일정으로 우리 회사 사원들이 수련회 겸 봉사하려고 간 것입니다. 대형관광버스로 겨울 새벽6시에 출발하여 하루 종일 걸려서 저녁때가 다 돼서 소록도에 도착하였습니다. 소록도에 계신 천우열전도사님이 첫 시간 특강을 하였습니다. 소록도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를 하면서 한센씨병 환우들의 애환을 들려주는데, 참으로 눈물겨웠습니다. 일제강점기 소록도한센씨병환자들의 눈물겨운 삶의 이야기였습니다.
눈썹도 코도 손가락도 다 없거나 문드러진 사람들이 일본 관리들의 혹독한 강제노역의 탄압을 받으며 생명을 연장하였다고 했습니다. 피투성이가 되도록 매를 맞고 인간취급도 못 받던 그들은 주먹손으로 벽돌을 만들고 쌓으며 예배당을 건축하였습니다. 추운겨울, 떨며 눈물로 울부짖어 기도하며 숙소를 지었습니다. 그들이 겪었던 서글픈 이야기를 하면서 전도사님은 ‘찌라도’를 아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소록도 밖으로 또 다른 섬이 있는데 그 섬 이름이 ‘지라도’인가?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라도’는 또 다른 소록도의 슬픈 사연의 이름이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선지자의 신앙고백처럼, 소록도 사람들은 눈썹이 없을찌라도, 볼 수가 없을 지라도 비록 몸이 아플지라도, 배가고플지라도, 하늘을 향한 소망만 가지고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 서신 분들이 하나님께 진정한 신앙고백으로 하늘을 향한 소망으로 감사와 찬양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낳은 10남매 중 9번째입니다. 그것도 눈이 하나가 감겨져 있는 채로 태어났습니다. 손이 귀한 집안도 아니고 정상적으로 생겨먹지도 않았으니 아버지가 저에 대해서 별 기대를 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10살에야 겨우 초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출생신고도 16세가 되던 해에 면사무소에 가서 제가 직접 본인의 출생신고를 해야 하는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1. 주제파악을 해라
저는 아버지한테서 “주제를 파악해라.” “주제를 넘지마라.”는 말씀을 참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분수에 맞게 살아라.” “분수없는 짓 하지마라.” 이러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때는 그 말의 깊은 속뜻을 알 리가 없으니 큰 관심 없이 그냥 듣기만 하였습니다. 학생들에게 국영수, 즉 국어/ 영어/ 수학은 어느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주요 과목입니다. 그런데 저희 아버지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주제는, 국어를 잘 하고, 분수는, 수학을 잘 하는 거 아닙니까? 저는 날 때부터 눈이 하나밖에 없는 장애자였습니다. 그렇게 저는 나이 스무 살까지 눈을 하나만 가지고 장애자로 살았습니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한쪽 눈으로 적응하였기 때문에 보는 데는 큰 불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장애자라는 것 때문에 겪는 열등감은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야 ! 너는 반쪽이잖아.” “한 달에 보름밖에 못 보는 놈” “너는 50% 밖에 안 되잖아, 좀 빠져라.” 하면서 놀려대기 일쑤였습니다. 같이 놀아주는 동무가 있겠습니까, 왕따 그 자체였습니다. 어린애가 겪는 수치심과 창피함, 부끄러움과 열등감은 아예 어려서부터 자신감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2. 예수가 바꿔놓은 인생
제가 11살 되던 해 1.4후퇴 피난민들이 우리학교에 와서 예배하는 모습을 보고 참여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를 믿었습니다. 꿈이 생겼습니다. 희망이 생겼습니다. 부끄럽고 창피하고 수치심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곳에서 오히려 눈을 두개 가지고도 눈을 하나만 가진 나만큼도 공부를 못하는 것을 보면서 도리어 감사하였습니다. 눈을 하나만 가지고도 늘 100점만 맞았습니다. 공부는 늘 일등만 하였고 급장은 6학년까지 혼자서 도맡아 하였습니다. 눈이 하나여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로 인생이 바꿔 졌습니다. 예수는 꿈과 희망이었습니다. 예수는 절망에서의 희망입니다. 예수는 꿈이요 곧 성공입니다.
3. 침례로 거듭남의 체험
1959. 11.1. 침례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돈라이스목사, 하아가 선교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는데, 물속으로 쑤욱 들어갔다가 그 물속에서 올라오면서 나는 놀랍게도 옛사람은 죽고 성령으로 새사람이 되는 신비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거듭난 삶을 살았습니다. 주일성수, 철야기도, 금식기도를 생활화 하였습니다. 금요일 저녁과 주일아침은 반드시 금식을 하였습니다. 주일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열심을 다했습니다. 지금도 그때 중등부 학생이던 이들 중에 정만옥 목사, 안상배 목사, 윤봉섭 목사 등은 훌륭한 목사로 목회를 잘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정만옥 목사는 저보고 장로님! 하지 않고 선생님! 하면서 지금까지도 일년에 한두 번씩 그 당시 먹던 농산물을 꼭 보내주고 있습니다. 눈도 하나짜리가 무얼 얼마나 가르쳤을까마는 그들은 잊을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저 “나의 믿음은 오직감사” 뿐입니다. 돌아보면 참 배고픈 시절을 살았습니다. 배고픈 설움이 얼마나 큰지 요즘 사람들은 이해를 못합니다. 보리밥, 수제비, 메밀죽, 고구마, 감자, 무릇, 쑥, 도토리, 칡뿌리, 산마, 산채나물. 등, 요즘이야 건강을 위해 일부러 찾는 웰빙식이지만, 그때는 끼니를 때우는 데 급급했고 굶어 죽지 않으려고 애쓰는 몸부림 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시절 그렇게 나는 웰빙 식생활에 적응을 잘한 덕분에 70평생 감기한번도 안 걸리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리로다. (하박국 3:19)
하박국 선지자의 이 고백이 저의 고백이 될 수 있도록 열등인생을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주신 제 인생의 멘토 두 분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한 분은 저의 청년시절에 제 신앙을 바로잡아주신 박상호 전도사님입니다. 그분은 함석헌 선생의 영향을 받은 분으로서 저에게 훌륭한 믿음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분은 40일 금식기도를 두 번이나 하셨습니다. 그분으로 인해 청년시절 저의 신앙생활의 기초가 확실하게 다듬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주일 아침과 금요일 저녁은 철저하게 금식을 하였고 매일새벽, 아무리 추워도 반드시 얼음을 깨고 냉수마찰을 하고 새벽기도를 해야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때는 그분이야말로 하나님의 대변자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저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쳐 주셨고 사표가 되어 주셨습니다. 저의 결혼 중매도 그분이 하셨습니다.
4. 믿음으로 한 결혼
저의 결혼관은 단순했습니다. 믿음이 돈독하면 다른 것은 다 괜찮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상대 쪽의 중매는 유영택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이 좋은 처녀집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전도사님의 말에 얼마나 신뢰했던지 첫 번 맞선보러 가면서 2.5돈짜리 금반지를 약혼예물로 준비해 가지고 갔습니다. 그만큼 모든 면에서 박상호 전도사님의 말씀을 절대 신뢰하였습니다. 첫 선보러 가는데 시외버스를 타고 하루 종일 갔습니다. 그쪽 목사님 댁에 들어가서 앉아 있는데 문밖에 왔다 갔다 하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손톱만한 도민증 사진하나 보고 마음에 결정을 하고 갔는데 문밖의 그 여성은 제가 맘속으로 그렸던 여성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살그머니 금지환을 꺼내서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고 말았습니다. 뜻밖의 상황에 나는 머리가 혼란해졌습니다.
그때 유영택 목사님이 “박 선생! 한 선생!” 하면서 우리를 불러 예배드리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은 빌립보서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설교하셨는데,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은 죄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때까지 혼란하던 머릿속이 정리되는 것 같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아멘” 하였습니다. 번민을 접고 아예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리고 속주머니에 깊이 넣었던 금지환을 다시 꺼내어 겉주머니로 옮겨 놓았습니다. 철저히 말씀대로 살겠다는 내가 결혼문제로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에 목사님은 우리 두 사람만 예배당에 가서 조용히 얘기하라고 시간을 주었습니다. 나는 목사님 말씀에 따르기로 하였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는 상대방이 나를 싫다고 말해주기를 바랬습니다. 상대가 싫다고 하면 죄짓지 않으니까. 그래서 열심히 나의 단점, 부정적인 면만을 골라서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군대 안가서 언제 입대할지 모른다. 사는 곳은 산간벽지 바닷가다. 여름이면 모기, 각다귀 등 지독한 해충이 많아서 고생이 심할 것이다. 농경지가 넓어서 감당하기가 대단히 힘들 것이다. 등등… 제 마음 속에 열등감으로 자리하고 있던 내용들이 그때는 마치 대단한 무기라도 되는 것처럼 당당하게 나열하며 말했습니다. 나는 상대방이 나를 싫다고 하기를 바라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끝까지 좋은 인상으로 남고자 하는, 요즘 흔히 말하는 <나쁜 남자>이었습니다. 아무튼 나에 대해서 부정적인 조건만 계속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그저, “예-그래요.” “예-그렇습니까?” 하고 도무지 “아니요” 하는 소리가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야지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저는 오히려 부끄러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의 믿음 없음을 자책하며 회개하였습니다.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처녀집사다운 믿음을 보고서 저의 마음을 굳혔습니다. 마침내 다음날 예정대로 약혼식을 하면서 준비해간 예물을 전달하고 우리는 6개월 만에 결혼식을 하였습니다. 아주 행복한 결혼식이었습니다. 다음 16일이면 결혼 46주년이 됩니다. 위대한 신앙은 아주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마음으로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면 합동해서 유익하게 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5. 적수공권으로 상경
저는 그 후 군대생활을 하면서 가정환경이 바뀌어 졌습니다. 군대생활 3년동안 저의 아내는 혹독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저는 3년 만에 제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적수공권, 그야말로 맨손으로 아이들 둘 데리고 이불보따리만 시외버스에 싫고 서울에 올라와 관악구 난곡동 철거민촌, 전도사님댁 마루에 짐을 풀고 서울생활의 첫날밤을 지내면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맨 주먹으로 시작한 서울생활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저는 하루도 맥없이 앉아 놀면서 실업자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루는 일거리가 없어서 길가에서 전주를 심기위하여 땅 파는 곳을 보았습니다. 나도 일좀 부쳐 주십시오. 우리 할 일도 없으니 다른 데나 가보시오. 날씨도 춥고 어깨가 근질근질한데 땀이나 한번 내 봅시다. 하루 종일 많은 량의 일을 하였으나 공짜였다. 그런데 저녁때 반장이 왔다. 웬 사람이냐고 묻는다. 공짜일 해준 사람이라고 대답하니 다음날부터 며칠간 함께 일을 하도록 해 줬다.
나는 자전거를 혼자서 겨우 탈정도인데 쌀집에 취직하여 자전거로 쌀을 배달하기도 하고 난곡동 철거민 촌에서 막노동, 잡부일 하면서 리어카도 끌고 페인트칠도 하고 건축현장의 일용근로자 등 수없이 많은 일거리를 찾아 노력하면서 보따리장사도 해보고 개인회사 종업원 노릇도 해보고 문패샘플 가방 들고 가가호호 방문하는 외판원 생활도 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문전박대를 당한 일도 많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늘 함께해 주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찌라도의 인내와 감사의 조건을 주셨습니다. 돈이 없을찌라도, 배가고플 찌라도, 하나님의 섭리로 알고 기도하며 감사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놀라운 은총으로 무에서 유를 일구게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꾸준히 노력한 결과, 오늘날 100여명의 사원과 함께 600만부의 캘린더를 생산하는 기업체를 일구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하셨습니다. 사업을 확장하여 양질의 신앙도서를 출판하며 각종 기독교용품을 제작하여 천만의 성도들에게 보급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회사로 발전하게 하셨습니다. 성공하기까지의 얘기는 다 표현할 시간이 없습니다. “나의믿음은 오직 감사” 책에 있습니다.
6. 해외입양아 초청모국방문
지금은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저희 회사도 크게 작게 여파를 받고 있습니다만, 지금까지 변함없이 해 오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해외입양아 초청 모국방문’행사인데, 지난 1996년부터 해외입양아초청 모국방문행사를 시작해서 올해가 15년째 됩니다. 일본사람인 페루의 후지모리 대통령이 일본을 빛냈던 것처럼 이들 가운데서도 대한민국을 훌륭하게 빛내며 대한민국의 아들딸 노릇을 확실하게 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15년째 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배고프거나 불쌍한 사람들이 결코 아닙니다. 2주간의 프로그램을 마치고 돌아갈 때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감사하다고 자기들도 이 다음에 그와 같은 일을 하겠다고 다짐하곤 합니다. 그리고 자부심을 가지고 살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희들도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1999년도에 왔던 사라몰간이라는 18세의 여자청년의 자기소감 발표에서 나는 눈물겹도록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가 한국에 오기 전에는 미국인이 자기를 보면서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으면 미국사람, 아니 중국사람, 그럼 일본사람, 사실대로 한국사람, 이렇게 입을 열수가 없었습니다. 국적이 분명 미국인이지만 그는 자아를 모르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돌아가면 분명히 자기는 대국인 중국 사람도, 일등국민 일본사람도, 아니고 당당하게 대한민국에서 온 입양아라고 말하겠다며 목메어 눈물짓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서 아이덴티티, 곧 자아를 발견한 자부심과 긍지를 갖는 것을 보면서 나는 얼마나 감격하고 자부심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일만큼은 언제까지라도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결 론-
저도 이제 72학년이 됩니다.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뒤돌아보면 제 주제대로 살았다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들을 참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기적이란, 거창한 이름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의 고난과 역경을 믿음으로 극복하며 이겨나갈 때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을 얻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불가능한 환경에서도 가능성을 꿰뚫어 보는 힘은 곧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저는 힘들고 어려울 때, 예수님의 등에 업혀져 상황과 한계를 거뜬히 뛰어 넘을 수 있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야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믿습니까? 아멘입니까? 이 말씀이 여러분들의 신앙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저는 이 말씀으로 어린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았던 열등감을 뿌리째 뽑았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타고난 주제대로 살도록 하나님께서 그냥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꿈과 비전” 을 주십니다. 뛰어넘을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그리고 상황과 여건을 반드시 뛰어넘어 승리하게 하십니다. 찌라도의 신앙으로 믿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돈이 없을 찌라도, 배가고플, 아프고 힘들, 고생이 될, 핍박이 심할, 자식들이 속을 썩일지라도 믿음으로 극복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그러했고 요셉이 그렇게 참고 견디며 꿈을 성취 하였습니다. 바울이 그러했고, 베드로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어부였지만 그가 자기주제를 뛰어넘어 꿈을 성취하였습니다. 우리주님은 능력 밖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한 달란트 받은 자가 한 달란트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큰 믿음으로 “주제와 분수”를 뛰어 넘어 찌라도의 신앙으로 감사하며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믿음은 오직감사로 충만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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