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순복음교회 금요심야기도회================================
간증설교(부평순복음교회 심야기도회)2017. 1.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오늘 밤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나누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수도사였던 말틴루터가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城 교회에 써 붙이면서 시작된 종교개혁운동이 금년에 500주년을 맞게 된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대단히 뜻 깊은 해로 생각이 됩니다. 우리 모두 화해와 용서의 정신으로 이 뜻 깊은 한해를 말이 아닌 실천을 생활화하는 해로 맞아야 할 것입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세월이 지나면서 세상은 바뀌고 새로워집니다.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2017년은 능치 못함이 없는 믿음의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난달 인도 한센인 마을에서 진료활동과 위로의 기도를 하였으며 아프리카 짐바뷰에, 잠비아, 남아공 등 6개국의 선교지를 방문하고 왔습니다. 참으로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들이었습니다. 짐바뷰에 무가베 대통령은 94세로 30년간 철권통치를 하는데 화폐도 없이 미국달러를 사용하는데 아주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북한 김일성이 살았을 때 8번이나 다녀왔다고 합니다. 우리일행 13명은 주일날 신병수선교사가 섬기는 무차라라교회를 가는데 산길 돌작길을 트럭 뒤에 짐짝처럼 실려서 비 오는 날 2시간30분을 갔습니다. 전기가 아예 없는 산골마을 예배당에는 아이들 60여명, 어른 40여명이 주일예배를 하는데 춤을 추며 찬양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예배시간에 대표기도와 설교를 한국말, 영어, 현지어, 등 3중 통역을 하기로 되었는데 우리가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주일예배가 벌써 시작되어 춤을 추며 찬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대표기도를 하는데 신병수 선교사가 나보고 늦었으니 그냥 혼자 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130여 년 전에 서양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처음 왔을 때 그들의 눈에 비친 한국 사람들의 모습이 어떠했을까 생각하니 그냥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이메여서 기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전염병에 시달리던 우리나라가 지금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대국, 선교대국이 된 것처럼 이 아프리카도 어서 속히 예수 믿고 훌륭한 나라, 가난을 떨쳐버리는 국가가 되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울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우리가 지금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대원군시대 우리나라는 척화비를 세우고 외국문화를 거부하면서 나라의 문빗장을 걸어 잠그고 외국 사람들의 발길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들어오다가 “1866년에 토머스 선교사는 대동강 변에서 최초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외국선교사들을 가로막는 대원군의 척화비(斥和碑)사건에도 불구하고 이땅에 복음이 들어 올 수 있었던 놀라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기독교선교의 초석을 놓은 선구자이수정, 선구자서상륜의 헌신적인 활동이었습니다. 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우고 철통같이 나라의 문빗장을 걸어 잠그며 선교사를 못 들어오게 하니까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사람들을 밖으로 불러냈습니다.
북쪽으로는 고려문을 넘나들며 중국에서 홍삼장사 하던 서상륜, 백홍준 김진기, 이성하, 이응찬, 등, 의주청년들을 중국선교사,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품삯을 주면서 조선말과 글을 가르쳐 달라고 해서 선생을 하던 의주청년들은 마침내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받고 성경번역에 동참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중국선교사 로스는 서상륜과 함께 1882년 한글성경 누가복음을 3000권이나 심양에서 발간했으며 서상륜은 그것을 가지고 자기고향 의주로 잠입했으나 신변의 위협을 느껴 황해도 소래로 내려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마침내 1883년 5월, 비로소 주일예배를 드리며 시작된 것이 최초 한국교회의 시작이요 그것이 바로 최초 한국에서 자생하여 세워진 소래교회입니다.
한편 남쪽으로는 1882년 임오군란의 위기에서 민비의 생명을 구출하였던 이수정은 그 공로를 치하하는 고종의 윤허로 일본신사유람단 2진에 편승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법률, 체신, 농법을 배우려고 먼저 쓰다젠을 찾아갔으나 쓰다젠으로부터 전도를 받아 복음을 받아드리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일본이 기독교를 받아드려 문화가 발전하는 것을 보고 조선에도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하고 여성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성경번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에 선교사 좀 보내달라고 선교사 유치운동을 벌이며 절규하는 편지를 2번이나 미국선교부에 보냈습니다.
이수정의 편지는 미국의 선교잡지에 1884년 성탄특집으로 기사화 되었고 이 글을 읽은 신학생들이 조선의 선비가 일본에서 미국을 향하여 선교사를 부른다고 너도나도 지망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이수정은 “조선의 마케도니아사람” 이란 별명까지 붙여졌습니다. 마침내 한국최초선교사 언더우드, 아펜젤러는 1885년 4월 5일 한국 땅에 첫발을 들여놓으면서 이수정이 번역한 최초 한글성경 마가복음을 한 아름씩 안고 들어왔습니다. 이는 2천년의 세계기독교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없는 특별한 사건이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와 역사가운데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에 100만 명이 모이는 기적적인 역사는 당시 세계가 깜짝 놀라는 한국의 성령운동으로 우리에게만 허락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역사로 기록하고 있다.
간증내용 요약
1. 태생의 장애 어머니는 혼자 해산의 고통을 감당하시며 이발로 탯줄을 끊어가면서 10남매를 낳으셨다. 나는 한쪽 눈이 감겨진 채 9번째로 태어나서 놀림과 왕따로 수치심과 열등감으로 소외된 인생의 삶을 22살까지 한쪽 눈이 감겨진 채 이어졌다. 그러나 초등학교2학년 때 예수 믿고 꿈을 키우는 희망을 가졌다. 소년 다윗의 용맹, 꿈을 성취한 요셉, 예수를 만난 바디메오, 야곱의 도전 정신을 거울삼으며 믿음의 소년으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16살에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비로소 나는 호적에도 없는 사실을 발견하고 내가 직접 내 출생신고를 하는 웃기는 삶을 살았다.
2. 아버지의 運命論 주제파악 해라, 분수를 알고 살아라. 주제넘지 마라. 사람의 운명은 타고난다고 이르는 말. 예수를 몰랐으면 그 운명론에 끌려서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주제란 바로 눈이 하나니 하나짜리답게 살라는 것이었다. 하나짜리에 걸맞게 四柱八字 대로 타고난 인생을 살라는 것인바 어릴 때 는 웰빙식사만 했다.(보리, 감자, 고구마, 메밀, 무릇, 쑥, 칡뿌리, 산채나물)
3. 주제넘은 꿈을 복음으로 승화 초등학교 2학년(1951)때 피난민 보따리에서 떨어진 복음의 씨가 열매를 맺었다. 1959. 11. 1. 성연 냇가에서 침례(돈 라이스목사)를 받으며 거듭남의 체험을 했다. 침례물속에서 나오며 이전 것은 물속에다 죽고 새사람이라는 신비한 느낌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당장 금요일 저녁과 주일 아침은 철저히 금식했고 겨울에도 반드시 얼음을 깨고 냉수마찰을 하면서 새벽기도에 매진하였다. 어린 청소년시절부터 속회예배인도자로 헌신하였다.
4. 능치 못함이 없는 믿음 나는 25세 결혼했다. 여러분! 몇 번이나 선을 봅니까? 저는 첫 선보러가면서 2.5돈 금반지를 아예 가지고 갔습니다. 바쁜데 믿음으로 약혼까지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의외로 그냥 되돌아오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유영택목사님 설교말씀(빌2장3절)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은 곧 죄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믿고 아멘 했다. 감사함으로 받아드렸다. 지금 3남매 연대, 중대, 백석대 등을 나와서 손자녀7명 등으로 대단히 행복하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 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 눈 하나가지고 군대 가게 되었던 이야기, 용광로에 들어간 고철이 불의 연단을 거쳐 새로운 철강재로 재생되듯이 3년간 군생활의 훈련과 연단을 거쳐 새사람이 되고자 했다. 서울에서 22살 때 눈을 수술한 후 병역 신체검사한 결과 을종을 받았다. 그 후 군 입대 영장을 받고 논산 수용연대에서 다시 신체검사를 하는데 본래 눈이 하나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으나 외관상 입증이 안돼서 어처구니없게도 군에 입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자녀 둘과 4식구가 시골에서 적수공권 무작정상경, 유영택목사님댁 마루에서 첫 밤을 지내며 서울사람이 되었다. 10여 년 동안 철거민 촌에서 이사를 25번이나 다녀가면서 살았다. 그러나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철저하게 믿음으로 난관을 잘 극복할 수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철저하게 다짐하며 살았던 것은 절대로 외상질은 하지말자. 이었다. 철거민촌에서 10여 년간 고생하면서도 근면하게 열심을 다해도 생계가 어려운 것을 보시고 1978년 마침내 담임목사님께서 아마도 집사님은 목회자가 되라는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고 강권하여 야간신학교를 보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자녀들 3남매가 모두 믿음의 가정으로 학원한번도 보내지 못했지만, 대학까지 성공적으로 마쳤다. 한편 나는 주경야독으로 진흥문화를 운영하면서 신학공부를 하여 1982년 2월 졸업하였다. 감사하게도 그때부터 문화사업이 활발해져서 한국기독교문화가 토착화를 이루는데 진흥이 선두주자로 나서면서 교회캘린더 및 기독교팬시용품을 많이 개발하여 내면서 경제적으로 급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 진흥문화를 일으킨 결정적 계기는 1983년 셋방살이하면서도 빚내가지고 유럽의 기독교문화를 견학하면서 의식전환의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 결정적인 기회가 되었다. 1984년 뉴-디자인 캘린더 출시로 성공의 끈을 잡았다. 그 당시 “위대한생애” 한 종목 53만부 판매의 기적은 한국 캘린더 업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으며 마침내 1989년도에는 대한민국 서울한복판에 진흥문화사옥을 건축하게 되었다. 1990년도 1월부터 사원들에게 구내식당에서 따뜻한 점심식사를 한자리에서 할 수 있도록 배려하면서 회사분위기가 확 바뀌고 소문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하면서 진흥인이 100여 명으로 늘어나고 캘린더 연간 600만부이상 생산을 하면서 기독교팬시, 신앙도서출판 등으로 진흥문화(주)를 든든히 세웠다.
5. 해외입양아초청모국방문행사 진흥창사 20주년을 맞으며(1996) 시작하다. 태어난 조국과 생부모를 모르는 채, 조국대한민국을 자기들을 팔아먹은 나라, 낳아준 부모를 팔아먹은 부모라고 생각하고 오해하면서 자기정체성을 모르는 채, 갈등 속에 살아가는 이들을 초청하여 2주간의 한국투어를 통하여 자기 정체성 회복운동으로 자긍심을 갖게 하였다. 조국의 반만년역사와 문화민족임을 일깨우고 서울의 고궁, 대학캠퍼스, 예절교육, 청와대방문, 용인민속촌, 설악산에서 동해안, 경주역사유적지, 울산공업단지견학, 부산과 제주도 2박3일, 등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다 보여주었다. 한편 3박 4일간 홈스테이로 한국가정문화체험을 경험하게 하면서 2주간의 한국투어를 마치는 날 환송식에서 조국을 보고 느낀 소감을 발표하게 한다. 해외입양아들은 저마다 자기정체성을 회복한 감격으로 엉엉 울면서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큰 보람과 자부심을 갖는다.
6. 역경의 열매 오직감사 70평생 살아온 삶을 돌아보며 역경의 열매 오직 감사라는 자서전과 회장이 된 장애소년이란 만화책 을 출간하여 약 3만권을 판매하였다. 내 삶을 돌아보면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서서 오직믿음으로 감사하며 근검절약을 생활화 하며 걸어온 것이 성공의 비결이었다.
7. (재)진흥장학재단 설립 필생사업
2010년 4월에 (재)진흥장학재단설립, 성수동 부동산을 기부하고 그 임대료로 진흥장학생의 장학금 1년에 6,7천만 원씩 지급하는데, 고등학교 1학년생을 선발하고 2학년 3학년까지 성적이 떨어지지 않으면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받도록 보장해 주고 있다.
장학금 수여하는 뉴스를 보던 장애인이 장학재단 설립취지에 감동을 받은 전신마비 장애자 한 분이 본인이 장애자 이면서도 매월 7만원씩 장학금으로 보태라고 송금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더욱 용기를 얻고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고자 다짐한다.
결 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나라를 지극히 사랑 하셨다. 대원군이 斥和碑세우고 선교사를 못 들어오게 막으니까 북쪽으로는 서상륜을, 남쪽으로는 이수정을 나라밖으로 불러내어 그들이 복음을 받아드리고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였으며 선교사 유치운동을 벌여서 이땅에 복음이 들어오도록 개방시키는 역사를 하나님께서 직접 주도하셨다. 이 놀라운 역사는 얼마나 감사한지 말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용인 신대원캠퍼스에 선구자기념비를 세웠다. 한국기독교선교역사의 선구자서상륜, 선구자이수정, 기념비를 11년 전에 건립하였다. 그곳은 한국최초교회인 소래교회의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해 놓은 곳이다.
오늘날 5만교회, 1000만의 성도, 2만 오천의 해외선교사 파송 등, 우리나라100여 년의 짧은 선교역사가운데 이렇게 기적과 같은 일들은 세계기독교사에서 유래가 없는 일이다. 이는 믿음의 선조들이 흘린 피의 대가와 이땅에 들어와 헌신하고 희생하신 선교사들이 흘린 눈물과 피의 값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함 같이 하나님께서 많은 열매를 주셨다. 능치 못함이 없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믿음으로 난관을 극복하게 하시고 선교사가 못 들어올 때 밖으로 사람들을 불러내어 예수 믿고 성경을 번역하여 가지고 들어오기까지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기독교가 급성장하게 하시고 선교대국이 되게 하셨음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오직 신실한 믿음, 열정적인 기도, 투철한 사명감으로 가정을 사랑하고, 교회를 섬기며, 오늘 날과 같은 국가적 위기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뜨겁게 기도함으로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이 다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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