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特稿】首尔信仰之旅(三):走访韩国基督新教历史博物馆--最早韩语圣经翻译于沈阳 福音首先从中国传入
“鹤发童颜”,这个词用来描述朴庆镇老先生颇为合适,虽然已经70多岁高龄,仍精神矍铄、喜乐开朗,笑声尤其具有浑厚的穿透力和感染力。
而当他站在自己一手创办的“韩国教会历史博物馆”(Korea Church History Museum)的大厅中央时,让来访人士无不看到历史的分量和鲜活。
这位老人家是位虔诚的基督徒、教会长老,年轻时带着妻子与幼子来到首尔打拼,第一件事就是建立了教会,后来自己出来开始作基督教文化产品的事业,40多年从一穷二白奋斗成为拥有100多个职员的公司,并建立了2栋大楼。
退休后,因着他有对保存教会历史的强烈感召,于是自己又创建了这家记展现过去130多年来韩国基督新教珍贵历史的博物馆,让更多人记住上帝真实的工作
他的博物馆里面,尤其重视最初韩国本土教会如何发展起来的珍贵历史。每当有来访者时,朴老先生总是激情洋溢而又如数家珍得分享起一段段珍贵的故事,他十分珍惜福音最初从中国传入朝鲜半岛的历史,特别是当他看到笔者几位从中国而来的来访者时,不禁问起是否知道最早朝鲜语圣经翻译的地点——沈阳东关教会今日的情况,回忆起多年前他与友人专程去这个教会寻访韩语圣经翻译的历史时的心情。
朴老先生强调说,当时还没有一个传教士进入朝鲜,福音也还没有进来,圣经却已经有了韩语版的,“这在全世界基督教历史中都是史无前例的,这就是中国和韩国之间发生过的故事。”
随后,这位年轻人带着刚刚翻译的圣经和听过的福音回到了自己的国家,建立了朝鲜第一间教会。因此,朴老先生提起这段历史,就对中国充满了感恩。
朝鲜语圣经翻译出来的奇妙故事
韩国最早的新教传教士是1884年9月20日抵达朝鲜的美国长老会医疗传教士Horace Newton Allen,随后是1885年4月另外两位传教士:美国长老会传教士Horace Underwood和美国监理会的传教士Henry Gerhard Appenzeller。
但朴长老分享说:事实上,这并非韩国基督教历史的开始,而是需要把视线拉长到1870年代。其中值得注目的是徐相崙等一些朝鲜草根的年轻人,他们来到中国的东北沈阳,从事红参生意养家糊口,就在沈阳他们遇到了苏格兰长老会的传教士、也是今天东北神学院和沈阳东关教会的创始人罗约翰牧师(John Ross)。
1872年,时年30新婚不久的罗约翰牧师受差派,携妻子远渡重洋经烟台来到今天的营口地区。他用一年时间学习汉语, 1876年在中国传道人的帮助下在沈阳传道,他感到应该把福音也传给朝鲜,但是因为他不懂朝鲜语,于是就叫了这些年轻人过来问:“你们做红参赚多少钱?”然后告诉他们说:“你们不要做那个了,教我朝鲜语吧,我会给你们比卖红参更多的钱。”这些年轻人来了之后跟着这位传教士一起,罗约翰就跟着他们用中文圣经学习了朝鲜语的语言和文字,这些年轻人之后也跟着罗约翰学习圣经,彼此相助。1879年,徐相崙这些朝鲜过来的年轻人相信耶稣并受洗了。
罗约翰理解了朝鲜语之后,说:“我们去翻译圣经吧。”于是,在徐相崙的帮助下,罗约翰牧师开始就用中文的圣经翻译成了朝鲜语的《圣经》。翻译朝鲜语的《圣经》,是罗约翰牧师在建立沈阳东关教会的同时,另一项非常重要的工作。在苏格兰圣经公会和朋友的资助下,翻译工作取得了很大的进展。
1882年,第一卷翻译出来的是《路加福音》,并被印刷出版了3000册。同年随后翻译出版的是《约翰福音》,1885年翻译出版四福音书,1887年翻译并出版了新约全书。今天东关教会大礼拜堂东南侧的小屋据说就是当年罗约翰牧师翻译朝文圣经的旧址。
与此同时,上帝在朝鲜另外一个邻国日本也在展开着奇妙的工作。这和另外一位叫做李树廷的年轻人有关。
李树廷是谁呢?他和中国人比较熟悉的一位朝鲜王室历史人物明成皇后颇有渊源。在朝鲜大院君时代有军阀之乱,他们闯进王宫要把明成皇后杀掉,就是李树廷等人护卫着皇后,他把明成皇后装扮成一般人然后背着她逃跑了。3个月后,军阀之乱平定之后,李树廷带着明成皇后回到了王宫。之后,当时的王高宗问李树廷说:“你是王后生命的恩人,我要给他一个高官,你要什么?”
“我什么都不要。”李树廷如此回答。“那你的愿望是什么?”王又问到。李树廷说:“你让我去日本学习法律、农业,新的文化和艺术,然后回来朝鲜。”
高宗同意了,1882年9月,李树廷来到日本,打算跟当时日本最有名的农学家新岛襄学习。新岛襄不仅是日本最优秀的农学家,也是当时日本最有名的基督教领袖、圣经学家,他也是日本最顶尖的私立大学同治社大学的设立者。新岛襄在教李树廷农学前先给了他一本圣经,指着房间里面的一盏灯说:“如果说这个光是孔子的光,那么耶稣的光就好像太阳光一样。”当时在朝鲜,知道汉字的人中最景仰的是孔子,他听了这样的话大吃一惊,很好奇这本书里面的耶稣是谁。
之后,李树廷学习了圣经,得到很大的感动,相信了耶稣,再没有学习本来过去打算要学习的法律和农业等,而是全力学习圣经,并且最希望让自己民族的百姓明白圣经。
李树廷在日本看到这里有灯有火车,有新的文化,但是自己的国家朝鲜这些都没有,他想到:“日本是因为有福音,所以有了这些新的文化,但是朝鲜呢,没有福音,没有福音,交通工具就是轿子,是人抬着人,是很贫穷、落后的国家。”因此,李树廷希望他的国家“一定要相信耶稣,也要让福音进去。”
于是,他开始着手把《圣经》翻译成朝鲜语,因为唯有如此,才能让福音进入朝鲜。
1884年12月,李树廷在日本翻译完成《马可福音》。1885年4月,派遣到韩国的传教士、美国长老会的Horace Underwood和美国监理会的Henry Gerhard Appenzeller就是带着这本《马可福音》到了韩国。
而李树廷最开始也是用中文圣经翻译成朝鲜语的。
最早朝鲜教会建立的曲折故事
不仅仅翻译圣经,最早朝鲜半岛教会的建立也与中国的沈阳息息相关。
当时,在沈阳和罗约翰一同学习圣经的徐相崙把和翻译好的朝鲜语圣经藏在身上,悄悄地回到朝鲜。当时无论是圣经还是其他西方的书籍,都是禁书,让人发现是要被砍头的。徐相崙本来打算回到自己的家乡地开始自己传道,但是被发现后当地的官员想抓他,他就只能逃到外婆家,就是今天位于北朝鲜的黄海道,在那里开始传道。
逐渐,在这里有了1、2个人信耶稣,然后就开始了做礼拜,虽然很简陋,但这就是韩国最初的教会。这是在1882年的故事,当时,还没有一位传教士进来。
1884年,教会从最初的草屋变成了砖瓦房。
1885年,教会半岛了更大的地方。也就在这一年,两位传教士进来开始建立教会。
传教士进来朝鲜,和在日本的李树廷的呼吁也大有关系。为了让自己的同胞得着福音的好处,他一方面把圣经翻译成朝鲜语,一方面又看到当时圣经是禁书,而且西方的书都不能拿进来,“那我翻译这个有什么用呢?”1884年,他就跟美国的教会写信说:就像马其顿的年轻人在呼喊着保罗一样,朝鲜的青年人也在呼喊着你们,你们过来给我们传道吧。美国的宣教杂志上刊登了他的这封信,有神学院的学生看到了之后,产生了热心,说:“我们都到朝鲜传道吧。”
于是,就在1885年4月份,两位传教士来到朝鲜传福音、建教会,并且建立起来医院、学校等朝鲜现代化最需要的这些基础,祝福了这个有很多苦难的民族。
最初的传教士Underwood到达朝鲜之后,就听说在黄海道已经有了教会。他第一个的感想就是:“我们在美国拿到了福音的种子过来,本来想在朝鲜种下这样的种子,但我们发现这里已经有福音的种子种下了,这里已经有了教会。所以我们不是拿着种子过来的人,我们是要把这个种子让它更好生长的人。”
在朴长老看来,徐相崙和李树廷是韩国基督教的先驱者。“这是历史性的事情,韩国基督教的历史不仅仅是有传教士的牺牲,还有着两个人的牺牲。在宣教士之前就有徐相崙和李树廷的故事。为什么要忽略这两个人呢?”因此,他专门在2007年时捐赠了7000万的韩币在南韩的一个地方修建了纪念最初的黄海道教会和徐相崙、李树廷的纪念碑,他希望有更多人了解和纪念他们当年的牺牲。
“韩国宣教的基础石就是这两个翻译圣经的人。”朴长老说,“而且,之前一般都是先有传教士进来,学习语言翻译圣经。当时,连一个传教士都还没有进入朝鲜,福音也没有进来,但圣经已经有朝鲜语的,这是全世界基督教历史中史无前例的。这就是中国和韩国之间发生过的故事。”
“这就是韩国基督教的历史。”朴长老说,“说这些话的时候我也是很激动。这个在世界基督教世界历史上是找不到的事件。”
“朝鲜的音最早是从中国接受的。”看到今天韩国教会从最初芥菜种发展到现在,他非常感恩最初中国和韩国的这段福音美好的历史。“我们因着中国的影响,接受了福音。”
他希望,今天的中国教会能够继续地“发力”,他相信未来中国在福音上会更大的祝福韩国。
출처 : http://www.christiantimes.cn/news/20355
<번역>
“은발의 동안”으로 박경진선생님을 표현하면 아주 적합하다고 생각됩니다. 비록 77세의 고령이지만 정신상태가 좋고 쾌활하며 웃음속엔 아직도 침투력과 감안력이 숨겨져 있다.
그분이 개인노력으로 만들어진 “한국교회박물관” 중앙에 서 계실 때 모든 방문객들에게 역사의 육중함과 생동감을 역력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분은 충실한 기독교신도일뿐만 아니라 교회장로님 이시기도 하다. 젊었을때 처자를 대리고 서울에 와서 자리매김을 할 때 가장 먼저 한 교회를 건축하면서 개척교회를 세웠다. 후에는 교회문화산업과 관련된 일을 40여 년간 종사하면서 아무것도 없는 맨 손으로 기업을 일구어 든든한 회사로 키우면서 100여명의 종업원과 빌딩2개를 건축하여 소유한다.
퇴직 후에는 교회역사를 보완 해야겠다 는 강렬한 사명감에 130여 년의 기독교역사를 정리해 가고 있으며 한국기독교의 진귀한 역사를 담은 역사박물관을 창립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진실한 존재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박경진장노님의 박물관에는 한국본토교회가 어떻게 발전했는가에 관한 역사를 소중이 여기면서 방문객들이 오면 박경진 장로님께서는 열정에 넘친 목소리로 매 단계 마다 의 교회발전역사를 얘기할 뿐만 아니라 최초에 중국에서 조선반도로 복음이 전해 왔다는 역사에 대해 아주 중요시하셨다. 특히 이번에 필자 몇 분이 중국에서 오셨다는 것을 아시고 최초 조선말 성경번역지인 심양 동관교회의 오늘의 상황이 어떤지도 물어보셨고 몇 년 전에 지인과 함께 전문적으로 심양 동관교회를 방문했을 때의 심정도 털어 놓았다.
박 장로님께서는 그때 당시 조선반도에 선교사가 들어오지도 않고 복음도 전파되지 않았는데 벌써 성경이 한국말로 번역 되였다면서 “이는 전세계기독교 역사 에서 전혀없었던 일이며 이것이 바로 중국과 한국사이에 발생했던 이야기”라고 말씀하셨다. 얼마지나지 않아 이 젊은이는 방금 번역한 성경과 들었던 복음을 가슴에 새기고 자기나라로 돌아왔으며 조선에서 제일 처음으로 교회를 세웠다. 박선생님께서는 이 역사를 예기하실 때마다 중국에 감사의 뜻이 가슴에 듬뿍 배어져 있었다.
조선 성경이 번역된 기묘한 스토리
한국최초의선교사는 1884년9월20일에 조선에 도착한 미국장로회의료전도사 Horace NewtonAllen이고 바로 이어 1885년4월에 또 다른 2명의 선교사: 미국장로회선교사 와 미국감리회선교사. 그러나 박 장로님이 말씀하기를 사실상 이것이 한국기독교 역사가 시작이 아니고 더 일찍 1870년대입니다. 그 중 주목해야 할 부분이 서상륜 등 조선 홍삼 장사꾼들이 심양에 와서 홍삼장사를 하면서 스코틀랜드장로회 선교사이신 오늘의 동북신학원과 심양동관교회 장소에서John Ross를 만난 그때입니다.
1872년 결혼한지 얼마 안 되는John Ross 목사님이 파견을 받고 처자를 대리고 바다건너 중국연태지역에 도착해서 오늘의 영구지역으로 갔었다. 그는 1년간의 시간을 거처 중국어를 배워서 1876년에 중국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심양에서 선교했으며 그는 복음을 조선에도 전파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조선말을 할줄모르기에 그 젊은이들을 불러놓고 홍삼팔아서 얼마 버는냐면서 나한테 조선말을 배워주면 홍상판 돈보다 더 많이 벌게 하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젊은이들은 선교사와 같이 중문으로 교류하면서 조선말성경을 배웠다. 1879년에 서상륜 등 젊은이들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하였다.
John Ross는 조선말로 성경을 이해한 후 서상륜 등 젊은이들보고 우리 성경을 조선말로 번역하자고 했다. 그래서John Ross는 중국말 성경을 조선말 성경으로 번역했다. 그렇게 해서 그때 심양동관교회를 창립하면서 했던 또 한가지 중요한 일이 바로 조선말성경 번역이였다. 후에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번역사업은 매우 큰 성과를 가져왔다.
1882년에 제1권으로 번역된 路加福音을 3000권을 출판했으며 연이어 요한복음을 출판했다. 1885년에 출판한 4복음책과 더불어 1887년에 신약전서를 출판했다.
오늘의 동관교회예배당동남측에 위치한 작은 방은John Ross목사님이 조선말성경을 번역하던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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