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교동교회와 ‘훈맹정음’ 창시자 송암 박두성(1888~1963)
▲ 교동교회,박두성의 생가터
▲ 연산군 유배지
▲ 교동대교 (출처 :다음 블로거 강화도 농부)
▲ 교동대교 (섬과 섬이 연결되었다.)
1. 교동교회
연산군의 유배지로 알려진 강화교동도는 기독교 유적지로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교동도는 강화도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 안의 섬’으로 조선시대에는 강화도와 인천으로 사람과 물자가 드나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했던 교통의 요지(要地)이기도 했다. 그래서 새로운 문물이 가장 먼저 집결되었고, 다른 지역보다 교회가 일찍 세워질 수 있는 좋은 조건이 갖추어 졌던 곳이었다.
그러나 2014년 7월1일 인천 강화도 본섬과 북한 접경 지역인 교동도를 연결하는 교동연륙교가 정식 개통됐다. 길이 3.44km, 폭 13.85m, 왕복 2차로의 교동연륙교는 총 사업비 890억 원이 투입됐으며, 2008년 9월 25일에 착공하여 6년 만에 완공되었습니다. 사장교 형태이며 교량의 길이는 3.44km로 이곳은 조수간만의 차도 심한데다 빠른 물살 때문에 교각 일부가 유실되는 등 공사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전한다.
마침내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더는 ‘섬 안의 섬’이 아니라 바다를 끼고 있는 육지처럼 교통이 편리해 졌지만, 기독교유적지인 상룡리 교동교회는 1933년에 세워진 이후 많은 기독역사의 흔적을 지닌 채,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폐허상태로 버려진 모습에 허름하다 못해 다 쓰러져 가는 낡은 건물과 종각은 보기에 안타깝다. 그러나 누군가가 종을 치면 뎅그렁! 뎅그렁! 종소리가 울려 퍼질 것만 같다.
사실 교동교회는 1899년 권신일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전한다. 권신일은 강화도에 두 번째로 세워진 홍의교회의 초대신자로, 아내와 함께 순교자적인 전도자의 삶을 각오하였다. 그의 신앙의 열정은 “우리가 하루 한 끼만 먹어도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니 어디든 가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합시다.” 하고 아내와 함께 도착한 곳이 교동도이었다. 오직 믿음으로 시작한 권신일 부부와 조카 권혜일은 사랑방 형태의 교회공동체를 이루어 복음을 전하다가, 1900년에 인천 강화연안 교인들의 헌금으로 읍내리에 초가집 한 채를 구입하여 사택 겸 집회장소로 사용하며 ‘교동읍교회’가 시작되었다.
당시, 교동에는 고려 충렬왕(1286년) 때 유학자 안향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공자의 위패를 처음으로 모신 향교가 있었는데, 이로부터 교동이 경상도 안동 못지않게 유교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한 지역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한 권신일 내외는 날마다 남편은 ‘사랑방’, 아내는 ‘안방’을 찾아 복음을 전했는데, 심지어 제례 때에도 찾아와서 “예수를 믿으라.” 고 권하는 바람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선비들이 마을사람들에게 그를 경계하도록 종용하는 한편 교동 군수를 찾아가 그를 교동도에서 추방하도록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군수가 “임금님이 계신 궁궐(덕수궁) 옆에도 예배당(정동제일교회)이 있는 것을 보면 임금께서도 교회를 반대하지 않고 교회를 세우도록 허락하시는데, 일개 군수인 내가 어떻게 내쫓을 수 있느냐? 난 못한다.”라고 대답한 것이 ‘군수가 교회를 지지한다.’ 는 소문으로 와전되면서 오히려 그동안 양반들 때문에 주저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용기를 내어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작은 섬 교동도에 첫발을 들여놓은 위대한 전도자 권신일의 발걸음은 참으로 세상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었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 권신일 일가의 열정적인 선교활동으로 1907년경부터 교동도에 무려 12개 교회가 세워지면서 교인들이 무려 1천여 명에 달하는 교동도복음화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교동교회의 초기 신자 중에는 박기만이 있었는데, 그는 교동교회 예배당을 짓기 위해 자신의 밭을 기쁨으로 내어놓는 열정적인 신앙인이었다. 그 신실한 믿음의 사람 박기만은 6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자녀들을 숭고한 신앙의 삶을 살도록 가르쳤고 그러한 아버지의 기도와 가정교육은 마침내 ‘훈맹정음’의 창시자 송암 박두성이 탄생하였다.
▲ 송암 박두성
2. 송암 박두성(훈맹정음 창시자)
송암 박두성은 강화군 교동면 상룡리에서 박기만의 6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1888년 4월 26일). 그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복음과 신앙인의 삶을 배우며 자랐다. 1906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어의동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박두성은 1913년에 조선총독부 제생원 내 맹아부로 발령 받아 부임하면서 맹아교육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의 나이 25세 때였다.
당시 맹아교육은 오직 일어 점자로만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에 안타까움과 불만을 갖게 된 박두성은 1920년부터 본격적으로 한글점자 연구에 착수했다. 그리고 1923년에는 비밀리에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7년간의 노력 끝에 결국 1926년 이른바 ‘훈맹정음(訓盲正音)’이라 불리는 한글점자를 완성했다.
1936년 제생원 교사직을 마치고 인천광역시 영화학교 교장에 취임하면서 박두성은 비로소 본격적으로 한글점자 보급에 힘쓰게 되었다. 그는 1940년 ‘조선맹아사업협회’를 조직하고, 점자통신교육을 시행했다. 1945년에는 인천광역시 시각장애인 회람지인 <촛불>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는 일제강점기하에서 강제된 교과서 검인정제도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글점자로 된《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을 출간했으며, 이로부터 맹인들에게도 한글교육과 더불어 민족의식도 고취되었다. 또한 1931년부터 성경의 점자원판(點字原板) 제작에 착수하여 1941년에 점자로 된 《신약성서(新約聖書)》를 완성하니, 그는 교육자이면서 동시에 신앙인으로서 대한민국의 시각장애인 들에게 꼭 필요한 선물을 안겨준 사람이었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 중에 ‘신약점자아연판’이 소실되는 비극을 당했지만, 박두성은 낙심하는 대신 다시 점자아연판 제작에 착수하여 1957년 마침내《성경전서》의 점역(點譯)을 완성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는 평소 시각장애인들에게 “배우지 않으면 시각장애뿐만 아니라 마음조차 암흑이 될 테니 배워야 한다.” 고 강조했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점자책은 점자가 상하니까 눕혀 놓지 말고 반드시 세워놓아라” 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섬세한 사랑과 정성을 쏟았다. 그의 삶과 노력의 결과인 ‘훈맹정음’으로부터 시각장애인들은 삶의 용기와 빛을 선물 받을 수 있었으니, 그는 진정한 맹인들의 아버지였다.
▲ 송암 박두성(훈맹정음 창안자)기념관
대한민국 정부는 시각장애인들에게 광원을 준 공을 높이 사서 <국민포장>을 수여했고(1962.8.15.), 다시 사망한 지(1963.8.25) 29년만인 1992년 10월 9일에는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또한 1997년 12월 17일 문화체육부는 1997-58호로 한글점자를 우리나라의 시각장애인문자로 고시했다. 한편 박두성이 활동했던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 국립서울맹학교 내에도 박두성의 추모비를 세웠다. 비문은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이 그의 서거 3주기를 추모하며 쓴 글이다.
“점자판 구멍마다 피땀괴인 임의 정성/어두운 가슴마다 광명을 던지셨소./이 아침 천국에서도 같이 웃으시리라/남의 불행 건지려고 자기 행복 버리신 임/한숨을 돌이켜서 임 마다 노랫소리/그 공덕 잊으리까. 영원한 칭송 받으소서.”
3. 훈맹정음 요약
조선총독부 산하 제생원의 맹아부 교사로 재직하던 송암 박두성 선생이 맹인을 위해 창안하여 1926년 11월 4일 발표한 한글 점자를 말한다. 이는 1829년 프랑스의 파리맹학교 교사였던 브라이유(L. Braille)가 고안해 낸 6점식 점자를 도입하여 한글을 점자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박두성 선생이 발표한 한글의 6점식 점자는 세로 3개, 가로 2개로 구성된 점을 조합해 초성과 중성으로 구분된 자음과 모음의 문자를 표현하였다. 이후 이를 기초로 하여 몇 차례의 수정ㆍ보완을 거쳐, 1996년 당시 문화관광부는 한글 점자에 관한 '한국점자규정'을 제정하여 표준한국점자를 고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98년 문화관광부(현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점자규정집>을 발간하였고, 2006년과 2009년 개정 '한국점자규정'을 고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한 칸을 구성하는 6개의 점의 번호는 왼쪽 위에서 아래로 1점ㆍ2점ㆍ3점, 다음 줄의 위에서 아래로 4점ㆍ5점ㆍ6점으로 한다. 한글 이외의 숫자나 과학ㆍ음악 등에서 사용하는 점자는 국제적으로 통일하여 사용하고 있다. (네이버시사상식사전,pmg 지식엔진연구소, 박문각)
- 글: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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