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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56>복음을 실천하는 구세군의 군인정신과 마리 위더슨 선교사

박경진 2016. 1. 6. 11:58

56. 복음을 실천하는 구세군의 군인정신과 마리 위더슨 선교사 

 

▲ 마리 위더슨 선교사

 

'군대 같은 교회' 구세군(救世軍, Salvation Army)은 영국 감리교 목사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와 부인 캐서린이 처음 시작했다.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소외된 가난한 계층을 구제하고, 나아가 자본, 폭력 등 여러 사회악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1865년 창설된 개신교의 한 종파이다. 구세군은 명칭에서 엿보듯 군대식 제도를 도입하여 다른 개신교 종파와 달리 독특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즉, 런던에 총본부(사령부)가 있으며, 각 '군국(軍國)'에는 사령관, 그 밑에 지역사령관과 지방장관이 있다. 각 지방에는 소속된 '영(營)'이 있어 담당 사관이 선교와 예배, 지역사회 봉사사업 등의 선교를 지도하는 방식이다. 사관(士官)은 제복을 입고 계급장을 착용하며, 영문(교회)의 병사들 역시 복장을 갖추고 있어 영혼 구원을 위해 세상의 죄악과 싸울 군대의 자세를 잘 보여준다 하겠다.

 한국 구세군은 일본에 있던 조선 유학생이 1907년 창립자 윌리엄 부스 대장의 일본 순회 집회에 참석하여 조선선교를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1908년 10월 1일, 정령(正領) 로버트 호가드(Robert C. Hoggard)와 10여명의 사관이 조선에 파견되었다. 한국 구세군은 1909년 <구세신문> 창간호를 내면서 여성교육, 구습타파, 계몽운동, 농사교육, 성경교육, 한글사용, 금주운동 등을 펼쳤다. 1910년에는 구세군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한국인 사관을 양성하기 시작했는데, 1925년 즈음에는 170개의 영문, 218명의 사관, 9,000 여명의 병사로 교세가 급성장했다.

 또한 매해 겨울마다 이웃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자선냄비운동’(1928년)을 비롯하여 고아원·병원·학교 등 다양한 사회사업을 벌였으나, 1939년부터 일제의 강압으로 구세군이 구세단으로 개편되고 1944년에는 모든 교회가 ‘합동교단’으로 편입되어 잠시 명맥을 잃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재건된 구세군은 다시 6·25전쟁으로 무려 78개의 교회와 많은 사회사업시설들을 북한에 남겨두게 되었고, 노영수 참령을 비롯하여 많은 사관이 순교하였다.

 

▲ 구세군 중앙회관 본관

 

 

 마리 위더슨(Mary A. Widdowson, 1898∼1956, 한국명: 위도선) 선교사는 스코틀랜드 출생으로, 어릴 적 부모를 따라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으로 이주하였다. 1925년 요한네스버그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남아프리카에서 구세군 사관이 되었다. 1926년에 한국 선교에 비전을 품은 크리스 위더슨(Chris W. Widdowson)을 만나 약혼하였다. 그녀는 1926년 11월 먼저 내한한 크리스 위더슨을 따라 1927년 가을 부산을 경유하여 서울에 도착했다. 이들은 곧바로 결혼식을 올리고 서울 변두리에서 보육원을 운영하며 고아들과 함께 생활했다. 이들은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성경말씀을 좇아 아이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보살폈다.

 그러나 거리에서 데려온 고아들로 인해 항상 전염병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위더슨 부부는 아프리카 케냐에서 사역하는 등 오지사역에 익숙했지만 발진티푸스에 걸려 심하게 앓고 고열로 며칠 동안 의식을 잃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을 회복하면 가장 먼저 고아들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는 등 자신의 몸보다 고아들을 더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이들은 한국에서 7년간 봉직하다가 아프리카 케냐로 파송되어 1934년 2월 한국을 떠났다. 그런데 어느 날, “너희는 이제 전과 같이 젊지 않다. 만약 내가 다시 한국으로 가라 하면 어찌하려느냐?”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1953년 1월 19일, 7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왔다. 6·25전쟁이 막바지에 달하던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이들 부부는 구세군을 다시 재정비하고 부흥시켰다.

 

▲ 마리 위더슨 선교사의 묘비

 

마리 위더슨은 구세군 한국사령관으로 많은 사역을 감당하는 남편을 내조하면서 고아원장과 가정단총재로 헌신하였다. 특별히 위암으로 투병하는 중에도 성탄절에는 자선냄비 모금에 적극 참여하고 거리로 나가 전도하고 동료들을 격려하는 등 열정을 불태우다가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녀는 남편에게 “나는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내가 죽어도 서러워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세요. 나는 한국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 살았던 것이 무한한 기쁨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해는 1956년 5월 10일 양화진 제1묘역에 안장되었고, 특별히 이승만 대통령이 조문하고 가족을 위로했으며, 김태선 서울시장 등 각계에서 조문객이 줄을 이어 60여대의 차량행렬이 장례식에 늘어섰다고 한다. 묘비는 1956년 9월 17일 건립되었으며 묘비에는 “나는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한국에서도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있다”라고 새겨져 있다. 한편, 그의 남편 크리스 위더슨은 사랑하는 부인을 양화진에 안장하고 묘지 옆에 두 그루의 단풍나무를 심은 뒤 1957년 사령관직을 사임하고 한국을 떠났다. 구세군 선교사로 두 차례에 걸쳐 한국에서 헌신했던 이들은 진정으로 한국인을 사랑하였다.

 

 파란 눈의 젊은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평안한 삶을 포기하고, 열악한 환경의 전염병과 풍토병의 위험을 무릅쓰고, 서양인에 대해 경계의 시선이 가득했던 이 땅에서 조선을 구하기 위해 헌신했다. 양화진에는 구세군의 여러 선교사들과 어린 자녀들이, 그리고 마리 위더슨 선교사가 그들과 함께 깊이 잠들어 있다. 오직 복음전파의 사명으로 병든 자를 치료하고 문맹을 깨우치며 희생과 헌신으로 이 땅에서 죽어간 선교사들로 인하여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고 대한민국이 있게 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글 -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