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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이야기] 하나님 안에서 한민족 고난을 함께 했다

박경진 2014. 9. 24. 09:35

 

[이야기] 하나님 안에서 한민족 고난을 함께 했다

한국 아픔에 함께 울고 광복 기쁨에 함께 웃은 일제시대 일본 그리스도인

신상목 기자
입력 2014-08-16 02:11

 

 

[이야기] 하나님 안에서 한민족 고난을 함께 했다 기사의 사진
오다 나라치 목사는 이름까지 바꾸면서 한국인을 위한 전도활동에 나섰다. 사진은 오다 목사 부부. 국민일보DB

 

 

해방은 한민족 전체의 열망과 염원, 순전한 희생이 빚어낸 결과였다. 광복을 대망(大望)했던 사람들 중엔 한국을 자신의 조국보다 더 사랑했던 일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핍박 속에서 복음을 전했고 군국주의와 천황제에 대항했다. 광복의 8월을 맞아 이들의 삶을 조명해 본다.

오다 나라치(한국명 전영복·1908∼1980) 목사는 한국에서의 전도활동과 독립운동에 뛰어든 대표적 일본 목회자다. 그는 1928년 미카게 성서학교를 졸업하고 전도를 위해 한국행을 택했다. 그가 한국에 온 것은 일본에서 만난 한국인 김씨 때문. 김씨의 부친은 3·1운동 당시 일본군 헌병에게 총살당했다. 김씨는 자신이 일본에서 공부하는 이유는 선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오다 목사는 큰 충격을 받고 진로를 고민하면서 석 달을 기도했다. 그는 기도할 때마다 ‘빨리 한국으로 가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한국에 도착한 그는 완전한 한국인이 되어 고락을 함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청년회 일을 도우면서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고 일본인이 거의 없는 함경북도 성진으로 옮겨 농촌을 비롯해 만주까지 순회하며 전도에 나섰고, 1931년 4월 무산에서 조선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고문을 받았다. 1937년 12월에는 평양 숭실학교에서 신사참배 비판 강연에 나섰다가 경찰에 연행돼 6개월간 수감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는 당시 강연에서 “신사참배는 국민의례가 아니라 종교행위이며 이는 십계명을 어기는 죄악”이라고 경고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기 1년 전이었다. 그는 1939년 일본으로 귀환 후 후쿠오카교회로 부임해 전영복이란 한국 이름을 사용하며 계속 한국인으로 살았다.

한국기독교문화역사관장 박경진 장로는 “그는 일평생 한국을 사랑했던 일본인 전도자였다”며 “한국 정부가 5·16민족상을 수여하려 했지만 끝내 거절했다”고 말했다.

야나이하라 다다오(1893∼1961)는 일본 학자로서 한국을 감싼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1911년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회에 입문해 기독교 신앙을 접하면서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1916년 우치무라의 한국인 친구 김정식이 강연하는 것을 듣고 감화를 받아 “성서를 바탕으로 한국인들의 내부로 들어가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따뜻한 손길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해주옵소서”라는 기도문을 일기로 적었다.

그는 도쿄 데이코쿠대학 경제학부 교수로서 한국 관련 논문을 반전, 평화 입장에서 발표했다. 조선총독부의 식민지정책을 문제 삼아 한국민족을 위한 현실주의적 개혁을 도모하는 주장을 펼쳤다. 개인 성서잡지인 ‘가신(嘉信)’을 거점으로 성서 강연에 매진했고 군국주의·천황제에 대해 날선 비판을 가했다.

그는 1940년 8월 한국으로 전도여행을 떠났다. 신사참배 때문에 고통당하던 한국 기독교인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경성에서 5일간 예정된 ‘로마서’ 강의였다. 1945년 패전 직후엔 ‘성서조선’ 김교신 선생의 추도문을 썼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