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 개화기 사회개혁ㆍ관습타파 앞장 | ||||||||||||||||||
승동교회와 백정출신 박성춘 장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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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교초기에는 개화의 돌풍과 맞물려 놀라운 일들이 많이 생겨났다. 박성춘 역시 그러한 사건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1862년 서울 관자골(관훈동)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포졸, 광대, 고리장, 무당, 기생, 갖바치, 백정 등은 칠천반(七賤班)이라 하여 하류계층에 속했는데 그중에서도 백정은 인구조사에서 제외되었고, 거주지역도 제한되어 있었다. 상투를 올릴 수 없고, 망건이나 갓을 쓰지도 못했다. 당시 망건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미성년의 표시로 여겨졌기에 나이 많은 백정도 아이 취급을 당하는 등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백정마을에서 백정의 딸과 결혼한 박성춘에게는 봉출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아들만은 백정신세에서 면해주려고 곤당골예수교학당에 보냈다. 당시, 1892년에 입국한 미국 북장로교선교사 사무엘 무어(모삼열)가 1893년 6월 곤당골교회를 개척하고, 교회 안에 학당을 세우고 무료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박성춘은 두 딸도 엘러스가 시작한 여학교에 보내어 공부를 시켰다.) 콜레라가 창궐했다. 이때 박성춘도 전염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는데 곤당골교회 사무엘무어 목사와 제중원 담당의사 에비슨 선교사가 백정마을을 찾아가 완쾌될 때까지 계속 왕진하면서 정성껏 치료해 주었다. 고종황제의 주치의가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는 백정에게 손을 대어 치료했다 는 것은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일로 감동받은 박성춘과 가족들 모두 곤당골교회에 출석하였으며, 마침내 박성춘은 1895년 초에 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그들이 세운 ‘홍문사골교회’는 순수 양반교회가 되었고, 곤당골교회는 백정과 상민만 남은 교회가 되었다. 이 일로 박성춘은 자신 같은 백정을 위해서 애쓰는 무어 목사에게 감동을 받고 전도하기를 시작하여, 곤당골교회는 다시 교인이 20여명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반면 ‘홍문사골교회’는 생명력이 없는 교회로 전락하여, 분리한지 3년 만인 1898년 다시 두 교회가 합쳐져서 ‘승동교회’로 재탄생하였다. 1911년 박성춘은 이 교회 장로가 되었다.
박성춘은 독립협회 사회운동에 참여하여 종로 군중집회에서 연사로 강연을 하는 등 개화기에 두각을 드러냈다. 한편 백정출신 박성춘의 아들 봉출은 세브란스를 졸업한 후 1907년 조선 최초의 서양의사가 되는데, 그가 의사 박서양이다. 그는 1917년 간도로 이주해 병원을 세우고 조선인 유일의 양의사로 활동하였다. 또한 민족교육기관인 숭신학교를 세워 청년교육에 헌신하였다. 또한 3.1운동에 호응해 만주 지역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한국민회 산하 군사령부의 유일한 군의(軍醫)로 임명되었다. 시고 교회를 일으키시며 나아가 그의 회심된 믿음으로 반상차별의 유교 조선의 질긴 역사와 전통, 관습을 끊어내고 사회개혁을 이끄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들어 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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