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회 및 집회

보성사회복지회 평생대학원특강

박경진 2010. 10. 15. 09:12

    보성 사회복지회관 평생대학원 특강 

꿈을 성취한 삶의 이야기 - 진흥문화(주) 회장  박경진장로-

  저는 1940년 충남 서산에서 10남매 가운데 아홉 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것도 한쪽 눈이 감겨진 장애를 안고 말입니다. 그래서 별명도 애꾸눈, 반쪽짜리, 50%였습니다.  장애로 부끄러움과 수치심, 열등감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더구나 저는 열여섯까지 호적에도 오르지 못한 아이였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호적등본을 떼러 동사무소에 갔다가 제 호적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직접 출생신고를 한 기구한 운명이었습니다. 실은 아버지께서 출생신고를 동네구장에게 부탁했는데, 부탁받은 구장이 깜빡한 것입니다. 그래서 16년 동안 호적 없는 아이가 됐습니다. 10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도 ‘한쪽 눈이 잠긴 아이를 공부시켜 무엇 할까’ 라는 집안의 배경도 한몫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부모님은 전염병과 가난으로 4남매를 잃고 6남매만을 성장시켰습니다. 일평생 머슴살이를 했던 아버지는 늘 “주제넘지 마라”, “분수에 맞게 살아라.”고 강조했습니다. 계속 진학을 못한 나는 배움에 대한 분수가 바로 여기란 말인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은 후 나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는 그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성경 말씀을 붙들고 결코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혼자 나를 낳으면서 입으로 탯줄을 끊은 다음 몸을 간신히 가누며 아직 채 여물지도 않은 보리이삭을 잘라 먹을거리를 손수 만들어 첫 국밥으로 먹으며 산후조리를 해야 했을 만큼 말 그대로 평생 고생보따리를 안고 살았습니다.

 

  한편, 저는 1/4 후퇴의 피난민들이 동네 교실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고 참여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기독교인이 되었고 그것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졸업과 함께 낮에는 논밭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는 주경야독의 길을 걸었습니다. 30리나 되는 거리를 오가며 나뭇짐을 팔러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중학교 교복을 입은 친구들과 마주칠 때가 가장 고통스러웠습니다.


  애꾸눈을 고치기 위해 서울로 도망을 갔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 온 나는 가정에선 충실한 일꾼이요, 교회에서는 충성스런 믿음의 역군으로 스스로를 달구었습니다. 새벽기도는 기본이며, 매주 두 번씩 금식을 통해 아낀 쌀을 교회에 성미로 바쳤습니다. 예수를 믿은 지 60년, 이 가운데 40년 동안은 매주 감사헌금을 드릴 정도로 항상 감사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해 먹을 것이 없어도 감사헌금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켰습니다. 한 끼 먹는 것도 신통치 않던 시절, 육체적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지만 나는 결코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원봉사는 이골이 날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낮에는 집에서 농사를 짓고 밤에는 교회 건축현장으로 달려가 밤을 새우다시피 하는가 하면 새로 부임하는 목회자들의 가사는 물론 주인도 없는 교회 신도의 논에 찾아가 공짜 일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교회에서 섬기던 전도사가 이웃교회로 자리를 옮긴 후 목회를 위협받을 정도로 궁핍한 생활하는 것을 보고 자신을 희생할 각오로 보따리를 싸고 전도사가 사는 동네로 이사를 하고 맨손으로 야산 5천 평을 개간하는 저력을 보여주면서 그 교회 신자가 되었습니다. 전도의 열기가 최고조에 이르던 어느 날, 데리고 있던 청년이 남녀 문제로 동네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자 모루산을 오르내리며 60일 간 철야 산상기도를 하는 뚝심도 있었습니다.


  저는 1964년 한춘자권사와 결혼해 첫 딸을 낳고 이듬해 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그리고 3년 만에 제대한 후 1969년 가족들을 데리고 이불 보따리만 메고 서울로 이사를 했습니다. 철거민촌 서울생활은 밥을 먹는 날 보다 굶는 날이 많을 정도였습니다. 가난이 정말 싫었습니다. 가계에 흐르는 가난의 저주를 끊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디를 가나 녹록치 않았습니다. 머슴살이했던 아버지의 가난을 그대로 물려받는다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서울 철거민촌 산비탈 오두막에서 서울살이를 하며 쌀가게에서 쌀 배달을 시작으로 양말, 메리야스 등 보따리 상을 거쳐 수저, 식칼 등 주방용품을 도매로 떼어다가 파는 리어카 행상은 물론 막노동에 이르기까지 안 해본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아내도 아이들을 돌보면서 밤에는 철거민촌 산중턱으로 건축용 모래나 연탄배달을 하는가 하면 달밤의 차떼기에 건축자재 나르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막노동도 항상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일자리를 찾기 위해 무작정 집을 나섰다가 길가에서 땅을 파고 있는 사람들에게 함께 일 좀 하자고 하였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오늘 할 일도 없고 마침 어깨가 근질근질한데 땀이나 한번 흘려 봅시다.”며 곡괭이를 뺏어들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공짜 일을 하였더니 작업반장의 눈에 띄어 일자리를 얻어 며칠동안 가족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지만 서울 생활은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달라진 건 막내아들이 생겨 다섯 식구가 된 것 뿐, 삶은 더욱 혹독했습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문패 달아주는 일을 하던 어느 날, 우연히 인쇄소 유리창에 붙은 ‘영업사원모집’ 광고를 보고 무작정 들어가 영업을 하겠다고 하면서부터 새로운 인생 서막이 시작되었습니다.

  유럽을 다녀오던 해에 성화그림 6장 그려서 캘린더 한 가지 제작하여 53만부를 판매하였습니다. 요즈음 캘린더 한 종목가지고 2, 3만부 판매하면 잘했다고 하는데, 단일제품으로 천문학적인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했습니다. 이후 회사는 급성장하였습니다. 부동산 투기 한 일 없고 곁눈 한 번 팔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린, 정직한 땀을 흘리는 자를 하늘은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처음 방산시장에서 남의 사무실 옆에다 책상 하나 놓고 맨 주먹으로 시작한 사업이 일취월장 발전하면서 지금은 100여명의 사원들이 신설동 1,500여평 사옥에서 디자인에서부터 모든 생산품 기획 제작, 완성품 판매, 영업 관리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수동 1,500여 평의 공장에서는 인쇄시스템과 제본시스템을 가동하여 카렌다 기독교용품일체 각종 인쇄물과 도서출판까지 완벽하게 처리하여 연간 달력을 500만부 이상 생산하는 기업이 되었습니다. 이 뿐 아니라, 1982년 감리교 총회신학교를 졸업함으로 배움의 한을 풀었으며, 진흥문화(주) 회장, 진흥홀리투어 대표이사,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회장을 비롯하여 감리교 장로회전국연합회 회장, 사)한국기독교 출판협회 회장, 사) 한국기독교구라회 이사장,  등 수많은 명예로운 직함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저는 인생의 터닝포인트에서 새로운 꿈과 희망을 가지게 되면서부터 역경을 넉넉히 딛고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이전의 고난이 거름이 되어 오히려 영광으로 바꿔지는 것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제가 낸 <나의 믿음은 오직 감사>라는 책의 제목처럼 지금의 제 삶도 이후의 제 삶도 늘 감사할 뿐입니다. 박경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