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 홍천 한서교회와 남궁 억 | ||||||||||||
한국기독교 성지순례 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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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통해 민족정신 일깨우고 독립운동 전개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으로 시작되는 찬송가 371장의 작사가로 친숙한 한서(瀚西) 남궁억(1863~1939) 선생은 1863년 12월 27일, 서울의 부유한 양반가문에서 태어났다. 1886년 고종의 어전통역(영어통역관)으로 등용되면서 관직에 입문하였고 이후 궁내부 토목국장, 독립협회 수석총무, 황성신문사 초대사장 등을 지냈다. 1910년 종교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5년 후에는 평신도로서 목회자를 대신해 설교할 수 있는 ‘본처 전도사’의 직분을 받았으며, 배화학당 교사로 민족교육에 힘을 쏟다가 56세 되던 1918년, 고향인 홍천군 서면 모곡2리로 낙향해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펼쳤다. 모곡학교(보리울학교)를 세우고 신앙교육을 했다. 일제가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일장기와 벚꽃을 보급하고 장려하려 하자, 남궁억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민족정신 고양을 위해 '무궁화심기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무궁화 묘목장을 만들어 전국으로 묘목을 보급하였다. 한편, 1933년 11월 2일 홍천경찰서 사법주임인 신현규가 출판사인 시조사(時兆社)의 직원을 가칭하여 남궁 억을 방문하였는데, 남궁 억은 시조 잡지를 팔며 무궁화 묘목을 사러 왔다는 신현규를 무궁화 묘포로 데리고 가 무궁화가 우리나라 국화라는 것을 설명하며 무궁화 시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고 사쿠라(벚꽃)는 활짝 피었다가 곧 지지만 무궁화는 면연히 피어나는 것처럼 한국 역사가 면연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제는 모곡학교를 수색했고 따라서 무궁화 묘목도 발각되었으며, 결국 남궁 억은 체포되었으며 모곡학교도 폐쇄되었다. 이것이 <무궁화동산 사건(십자가당(黨) 사건)>이다. 남궁억 선생은 이 일로 1933년 11월 구속되어 옥고를 치르다 1935년 병보석으로 석방된 후 1939년 4월 5일 77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남궁억 선생의 22년 믿음의 발자취를 생생히 느낄 수 있는 교회 진입로에 들어서면 오른편엔 한서교회, 왼편엔 한서 남궁억 기념관, 중앙엔 1998년 7월에 복원된 기념교회 건물이 세워져 있다. 2004년 6월 개관한 <한서 남궁억 기념관>에는 십자가당 사건 취조장면 재현, 모곡학교 모형, 붓글씨와 저서 등이 전시돼 있으며 그가 작사한 노래들을 청취할 수 있는 코너도 있다. 또한 교회 앞에는 63종, 2000여 그루의 무궁화를 심은 ‘무궁화동산’이 조성되어 있는데 동산 가운데는 남궁 억 선생 기념비가 서 있다. 현재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현재호 목사는 남궁 억 선생의 제자였던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이곳에 찾아왔다고 한다. 잘 나타나있다. “주여, 이 나이 환갑이 넘은 기물이오나 이 민족을 위해 바치오니! 젊어서 가진 애국심을 아무리 혹독한 왜정하일지라도 변절하지 않고 육으로 영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무궁화를 통해 꺼져가는 민족정신을 되살리려 한 남궁억 선생의 사상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민족정신과 신앙심을 깊이 일깨워 준다.
-소재지 :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2리 386 (담임 현재호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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