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회 및 집회

한/카문화교류협회 동정

박경진 2009. 11. 19. 19:40

 한/카문화교류협회, 이사회 및 친목 야유회

한/카문화교류협회는 1999년 토론토대학교 명예교수 유재신 박사의 주선으로 이윤학, 황인수,박경진 등의  발기로, 우선 토론토대학 동양학부 도서관에 헌 책 보내기 운동으로 뜻을 모아 발족되었다. 점차 토론토 대학 한국학과 지원사업으로 확산되었으며 앞으로 맥길대학까지 후원교류 하기로 하였다.

특별히  "홀리시티 밝은음악선교단" 의 감동적인 찬양은 참으로  큰 은혜가 되었다.  

 

한용상 부회장의 한/카문화교류협회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간절한 대표기도를 하였다.

 

 

 

이종무목사의 설교

 

 

 

최효석목사의 축도

 

특강: 박경진장로, ( 한국과 카나다는 교류역사의 46년, 선교역사의 100여년, 한국전쟁에 참전으로 혈맹우방국

 

- 특  강 -

 

『캐나다 선교사와 참전용사 및 한국/캐나다간의 교류』

 

  한국과 캐나다 양국간에 공식 외교관계가 수립된 것은 1963년 1월이며, 1964년 8월 캐나다주재 한국대사관이 설치되고 1974년 1월 한국주재 캐나다대사관이 문을 열었다. 그 후 1979년 2월 한국 외무장관이 캐나다를 공식방문한 데 이어, 같은 해 11월 캐나다 상원의원이 박정희 대통령 조문사절단을 이끌고 방한했었다. 그 후 1981년 캐나다의 트뤼도 총리가 방한함에 따라 1982년 전두환 대통령이 캐나다를 공식 방문했었다.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에 501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북한과는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이렇듯, 캐나다와 한국 간 외교관계는 40여년의 짧은 세월동안 너무나도 가까운 우방이 되었다.

  한국과 캐나다가 수교한 것은 1963년이지만, 캐나다는 이미 19세기말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우리와 관련을 맺었으며, 6·25전쟁 때에는 정식 외교관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연합(UN)군으로 참전하는 등, 실제 교류의 역사는 100년이 넘는다.

  

1. 캐나다 선교사

  일제가 외국 선교사들을 추방한 1941년까지 한국에서 활동한 캐나다 선교사의 숫자는 총 184명으로, 이들이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햇수를 모두 더하면 무려 3073년이다. 카나다인으로 가장먼저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은 1888년 내한한 토론토출신의 선교사 게일(J. S. Gale: 1863-1937, 한국명: 기일奇一)이다. 그는 1888년 토론토대를 졸업하고 기독학생회 선교사로 파송돼 한국에 도착, 신구약성경과 ‘천로역정’, ‘그리스도를 본받아’, ‘로빈슨 크루소의 표류기’ 등을 한국어로 옮겼고, ‘춘향전’, ‘구운몽’ 등을 영문으로 번역했으며, 한영(韓英)사전도 편찬하는 등, 전도 외 교육, 번역, 사회계몽 및 국학 보존 및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온주 마캄 출신의 말캄 펜윅은 1889년 한국에 와 원산에서 밭을 사 농사를 지으면서 선교했다. 서양농법 기술보급에 공이 크다. 의료선교사인 로버트 하디는 1890년 한국에 도착, 1903년 이른바 원산 부흥운동을 일으켜 1907년 평양부흥운동의 효시가 됐다. 교육자, 저술가로 활동했다. 오리버 에이비슨은 영국 출신의 캐나다 이민 2세.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1893년 한국에 와서 세브란스 병원과 세브란스 의과대학을 창설했다.


  의료선교사인 윌리암 홀은 1891년 한국에 도착해 최초로 평양을 전도 개척했고 교육 사업에 힘쓰다 1894년 34세로 사망했다. 의사였던 부인이 뒤를 이었고 역시 의사 아들 셔우드 홀이 한국최초로 결핵치료병원을 해주에 세우고 한국 최초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는 등 의료분야에 크게 힘썼다. 월리암 메킨지 선교사는 노바스코샤주 출신으로 1893년 부산에 도착, 황해도 소래에서 한국 사람과 똑같이 생활했다. 그곳에서 과로로 사망했다. (양화진외국인묘지에 묻힌 캐나다 선교사와 가족들 중엔 게일의 아들 비비안 게일, 손자 맥도월 게일, 윌리암 홀 부부와 딸 에디스 홀, 셔우드 홀 부부와 아들 프랭크 등 총 8명이 있다. 원산과 함흥, 소래 등에도 각각 1명씩 묻혔다.)


  스코필드(F. W. Schofield :1889-1970, 한국명: 석호필)는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처음 한국 땅을 밟은 뒤 3·1운동을 비롯한 한민족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선교와 장학사업을 통해 사랑과 나눔을 설파하면서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을 돌보고 제암리 학살사건을 해외에 알렸다. 사람들은 그를 기미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에 더해 '34번째 민족대표'라고 불렀고, '석호필(石虎弼)'이라는 한국식 이름까지 주었다. 일제에 의해 추방됐던 그는 58년 한국에 돌아왔다. 서울대 연세대 중앙대 등에서 강의하며 성경반을 인도했고, 이승만 정권의 3선 개헌을 반대해 탄압받기도 했다. 1970년 그가 사망하자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2. 참전용사 

  이처럼 19세기말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된 프랜시스 스코필드, 올리버 애비슨 등은 한국의 교육 및 의학 시스템개발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인적교류 외에도 한국과 캐나다가 국가로서 공식적인 관계를 맺은 시기는 1947년 자유선거 감독을 위해 캐나다가 유엔 커미션에 참가한 때부터다. 특히 한국전쟁은 두 나라의 우호관계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사실 많은 사람이 잘 모르고 있지만,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캐나다는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군 병력을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지원한 나라다. 약 2만7000명의 캐나다 군인이 유엔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했고, 그 중 516명이 전사했다.


3. 한국과의 교류

  오늘날, 한국과 캐나다는 수교 이래 인적교류가 가장 활발한 시기를 맞고 있다. 캐나다 전역에 약 15만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고, 매년 또 다른 15만 명의 한국인이 캐나다를 여행한다. 또한 약 5만 명의 한국학생이 학업을 위해 매년 캐나다로 떠나고 있다. 한국과 교류하는 캐나다인은 매년 약 4만5000명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뿌리 깊은 역사적 유대관계와, 풍부한 인적 교류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캐나다는 한국인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면이 많다. 가장 큰 오해 가운데 하나는 미국과의 관계다. 미국의 옆에 위치해 있고, 영어를 쓴다고 하여 많은 한국인은 캐나다인이 미국인과 똑같다고 인식을 한다. 이는 마치 일본사람과 한국사람이 똑같이 생겼다고 얘기하는 외국인들의 시각과도 같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비슷하게 생겼지만 너무나 다른 사고와 문화와 역사를 가지고 있듯이, 캐나다도 미국과 비슷한 이민국가이고 가까운 우방임에는 틀림없지만 상당히 다른 이민정책을 가지고 있다. 캐나다는 다문화주의 정책을 성공적으로 실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민자들에게는 자신들의 문화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허용되고 장려된다.


  캐나다는 G7국가로서, 안정되고 선진화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우디아라비아보다도 더 많은 석유를 가진 원유국이자, 세계 최고의 다이아몬드 생산국 가운데 하나다. 뿐만 아니라 전기통신·우주공학·생명공학과 같은 첨단 기술의 선두 주자다. 한국처럼 캐나다도 인터넷강국이다. 95% 이상의 캐나다산업이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세계 최고의 전자정부를 자랑하는 나라다. 교역 분야에 있어서도 캐나다는 2001년 기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에 투자를 많이 한 나라다. 국제 관계에 있어서도 캐나다는 다각적인 노력을 통해 세계 평화와 경제적 번영을 추진하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또 유엔설립 회원국일 뿐만 아니라 뒤에 세계인권선언을 기안했고 유엔의 평화 유지(PeaceKeeping) 개념을 창시한 나라가 캐나다다.

 

세계무역기구(WTO)/유엔아동기금(UNICEF)/서방선진8개국(G8)/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아태경제협력체(APEC) 등을 비롯하여 다른 그 어느 국가보다도 많은 국제기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렇듯 캐나다는 한국인들에게 있어 가깝지만 아직도 너무나 알고 싶은 것이 많은 나라다.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앞으로 열린 관계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첫 발걸음을 내딛으며 두 나라가 앞으로 미래를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세계무대에서 두 나라의 역할은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다.

 

캐나다는 초강대국 미국과 넓은 국경을 함께 나누고 있는 미국의 우방이자 이웃국가다. 그리고 한국은 10년 후면 또 하나의 초강대국이 될 중국을 바로 곁에 두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한국과 캐나다는 앞으로의 관계 설정에 따라 중간세력으로서 국제 사회에서 주도적으로 평화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동반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두 나라가 서로 더욱 더 긴밀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 이유이다.

 

한/카문화교류협회, 10년전에 토론토대학교 한국학과후원회로 발족 되었던바, 이제는 명실공히 국제간의 문화교류의 역사적인 사명을 지닌 법인 단체로 발전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내년부터는 토론토대학과 맥길대학까지 후원을 하며 교류를 확대하게 된 것에 자부심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