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회 및 집회

보성사회복지관 (평생대학 특강)

박경진 2009. 9. 16. 22:19

 보성사회복지관  평생대학 특강 2009. 9. 16. 11:00

 

  전남 보성읍에 자리잡고있는 보성사회복지관에서 운영하는 평생대학에서 특강

-제목 :  꿈을 이루는 삶

-강의 : 11:00~12:00  (300여명 참석)

-내용:  대원군시대 쇄국정책으로 문을 닫고 살던 조선이 선교사가 들어와 복음을 전함으로 개화되기 시작하였고, 오늘에이르러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 이는 1882년 일본에간 이수정이 성서를 번역하였는데 최초선교사가 들어올 때 우리말로된 그 성경을 들고 올 수 있게 하였으며, 조국의 선교를 위하여 미국에 선교사 유치운동의 편지를 두번씩이나 보내는 등 한국선교역사의 초석을 놓는 역활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꿈을 가진 많은 선각자들의 헌신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었다.

 평화로운 보성읍의 전경

 보성평생대학의 진지한 강의의 귀를 기울이고있다.

 

 

보성사회복지관 옥상에서 바라보는 보성읍내의 평화로운 전경, 보성읍교회 등

 

 이수정의 한시족자의 내용을 설명하며 126년전의 이수정의 친필 한시와 당시사진을 감명깊게 설명하다.

 

한국기독교선구자 이수정 이야기(꿈을 이루는 삶)

 

  오늘 저는‘꿈을 이루는 삶’을 주제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가난한 집, 평생 머슴살이를 하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열 남매 중 아홉 번째,아들로서는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얼마나 가난했던지 여덟 번째로 아들을 낳았을 때는 1937년 5월 하순, 산모가 탯줄을 이빨로 끊고 산후처리를 혼자서 다 했답니다. 가난한집 보릿고개에 먹을 양식이 없으니 첫국밥도 못 얻어먹고 산모가 직접 양지바른 밭에 나가서 누릇누릇하게 익어가는 보리이삭을 잘라다가 솥에 넣고 쪄서 다시 비벼가지고 또 볶아서 맷돌로 들들 갈아서 죽을 쑤어 첫국밥으로 미역국도 없이 앉아서 드셨답니다. 어린아이 젖 내주기 위하여 그렇게 힘든 일을 하면서 산모가 직접 끼니를 해결했답니다.


  그것이 우리 어머니뿐이었겠습니까? 물론 여기 전라도는 풍요로운 곡창지대여서 아마 그렇게까지 고생하고 사신 분들은 안계시겠지요 마는 우리 충청도 어르신네들 억시우루 고생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보릿고개 아닙니까. 보리만 익으면 그래도 보리밥이라도 실컷 먹어보겠는데 왜 그다지도 보리가 더디 익는지 그래서 누릇누릇하면 밭에 나가, 덜 익은 이삭을 잘라다가 쪄서 비벼 그 알갱이를 볶아서 죽을 쑤어 먹던 시절,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그런 우리나라가 요즈음 먹다버리는 음식물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연간 15조원이나 된다고 하며 그 처리비용만도 일년에 4천억원이랍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미국발 금융위기가 몰아닥쳐, 전 세계가 몸살을 앓으며 위기를 느낄 때 경제를 살리려고 계획을 세워 추진하기도전에 우리나라는 유모차부대를 동원하여 1대에 몇 십만 원씩 주면서 촛불시위를 벌이며 나라야 되거나 말거나 야단들을 쳤는데 그때 쓰레기 청소비만도 놀라지 마십시오. 77,766,040원이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이야기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만큼 우리가 잘 살게 되었다는 반증입니다.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이러한 선진국 수준의 삶을 살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또한 유럽은 언제부터 세계를 놀라게 하는 찬란한 기독교문화가 세계를 리드해 나가고 있는지 여러분 아십니까?


  사도바울이 아시아 구석구석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데, 가는 곳마다 매 맞고 옥에 가두고 가혹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밤에 환상가운데 유럽 사람이 손짓하며 불렀습니다. 그는 마케도니아 사람이었는데 이리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시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곧바로 유럽 땅 마케도니아라는 곳으로 건너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유럽은 마침내 기독교문화토착화의 꽃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유럽은 찬란한 기독교문화의 꽃을 피우며 발달하니 세계를 제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맨주먹 쥐고 서울에 정착할 때 철거민촌에서 굶기를 밥 먹듯 했습니다. 10년을 고생하면서 뛰다가 83년도 3월 달에 셋방살이 주제에 빚내가지고 유럽 가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기독교문화사업을 하겠다는 사람이 유럽을 안 보고 되겠느냐는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유럽 다녀오던해는 돈을 갈퀴로 긁었습니다. 단번에 사업이 활기를 띠면서 일약 올라서는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안목과 꿈이라는게 대단한 것입니다. 맨주먹 쥐고 서울의 철거민촌에 이불보따리를 유인상 전도사님댁 마루에 내려놓고 시작한 삶이 10여년은 코피 나게 고생하였습니다만 유럽의 기독교문화를 보고 듣고 영향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바로 오늘의 진흥을 일구어 왔으며 이제는 100여명가족이 3개회사로 분류하여 아들딸 3남매가 각각 사장이 되어 새롭개 경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은 꿈을 꾸는 자에게 열려있습니다. 꿈을 꾸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각오와 결단이 문제입니다. 하고자하는 꿈과 그 정신이 문제입니다.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이 일류대학을 나와서 대통령했습니까? 가문이나 재력이 있어서 대통령했습니까? 그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오직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가 가난과 질병과 무지에서 헤어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목숨 걸고 이땅을 찾아왔던 선교사들의 꿈과 비전 그리고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민족이 세계에서 이처럼 잘 사는 민족, 잘 사는 국가가 된 것은 바로 선교초기 선교사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최초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이곳 전라도출신 한 분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옥과현을 들어보셨습니까? 지금은 곡성군 옥과 입니다. 오늘 옥과 출신 이수정에 대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1. 한국교회사와 이수정 (1843.5 ~ 1886.5.28)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에 대하여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또한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 귀한 복음을 누가 조선에 전해 주었을까. 지난날 나는 신학교에서 윤병상 교수로부터 한국교회사를 배웠습니다. 어느 날 이수정(李樹廷)에 대하여 강의를 들으며 노트해놓은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실감하지 못했는데 조선에 복음이 전해지기까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으로서 한국기독교 선교의 초석을 놓은 역사적인 사람이 바로 이수정이라는 것을 새롭게 확인하면서 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을 가지면서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수정은 1843년 전라도 옥과 현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이수정의 가문은 천주교 신자였던 그의 숙부 이택규 때문에 대원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은 대개가 중인 이상들이었는데,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천주교 탄압에 의하여 순교 당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수정은 이러한 사건을 보고 들으며 성장했기 때문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 이병규는 한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한문사숙에서 훈장의 가르침에 따라 한학을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이수정은 유난히 공부를 잘해서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문과에 합격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집안 어른들이 처참하게 순교 당했다는 말에 더욱 관심을 갖고 한학에 몰두하며 천주학(西學)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급제한 이수정은 젊은 나이에 상경하여 조정 중신들의 활동무대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의 기록에 의하면 이수정은  “Court Annalist (코-트 애널리스트)”였다고 하는데 이것을 번역하면 조정연력기자(朝廷年歷記者)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한국교회사가 김양선 목사는 그의 저서에서 조정역사가는 홍문관, 승정원 승지에 해당되는 높은 벼슬자리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으로 대외통상이나 교류가 막혀 서구문명세계를 모르는 채 나라 안 당파싸움으로 무지와 가난에 찌들고 전염병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가까스로 중국과의 교류의 틈을 이용하여 들어온 천주교 역시 쇄국정책의 칼날 앞에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핍박당하거나 대량 학살당하는 등으로 포교가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정세는 대원군을 밀어내고 민비파는 반 대원군파를 규합하여 1876년 이른바 <조일통상조약>으로 조선-일본 간의 통상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외교의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2. 임오군란과 이수정

  1881년 신사유람단 제1진이 최초로 근대화된 일본을 시찰하기 위해서 12명이 부산을 떠나 현해탄을 건너 요꼬하마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들 신사유람단은 문교, 내무, 농상, 외무, 군부, 세무, 조폐, 우편 통신 등 다양한 시설을 견학하며 동경을 비롯한 일본의 선진화의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라게 됩니다. 많은 견문을 넓힌 그들은 폐쇄된 조선의 미래에 대한 우려와 함께 개화의 필요성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후 2차 신사유람단이 형성되어 인천 제물포에서 메이지 마루 배를 타고 1882년 9월 떠나게 되는데, 이들 중에 이수정이 함께 있었습니다.


  이수정이 신사유람단 비수행원으로 갈 수 있었던 데에는 임오군란이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습니다. 1882년 6월 5일 일어난 임오군란은 군인들에게 봉급으로 지급한 쌀에 모래를 섞여 나온 것에 대한 불만이 발단되어 민비일가인 외척에 대한 반감으로 민씨 일가를 쳐 죽이자고 임오년에 일어난 군대의 난을 말합니다. 6천여 명을 3개부대로 조를 편성하여 민비를 살해하려고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당시 승정원 승지신분이었으나 항상 무기를 소지하고 민비의 곁에서 경호를 맡았던 이수정은 군인들이 궁궐에 난입하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서 황급히 민비를 궁인복장으로 가장하고 삼엄한 군대의 눈을 피하여 궁궐을 빠져나올 때 조대비의 가마를 이용하였다. 광진 나루를 거쳐, 무사히 경기도 여주와 장호원을 거쳐 충주까지 민비를 무사히 피신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후 청나라 군대에 의해 조정이 평정되자 이수정은 민비를 모시고 다시 입궐하게 되었는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비호같이 몸을 날려 위기 속에서 민비의 생명을 구해준 이수정을 높은 벼슬을 하사하려 했으나 극구 사양하고 대신 제2차 신사유람단의 비수행원으로 일본에 가게 된 것입니다.1882. 9. 29. 신사유람단 2진이 요코하마에 도착하자 비수행원의 신분으로 자유로운 이수정은, 1차 신사유람단원으로 이미 일본을 다녀온 절친한 친구 안종수의 소개장으로 일본의 유명한 평신도 지도자이며 농학자인 쓰다젠(津田仙)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수정의 유학목적은 새로운 농사법을 연구해 농업 조국의 미래를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농학을 논하고자 했던 자리는 기독교를 토론하는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쓰다젠은 공자의 빛은 이 방안의 호롱불과 같이 부분적이어서 일본의 어두운 곳까지 비치지 못하나, 예수의 빛은 태양과 같아서 일본의 방방곡곡, 전 세계, 지구 이 끝부터 저 끝까지 비친다는 말부터 시작하여 기독교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된다. 산상수훈족자를 흥미 있게 읽으며 그 의미를 감상하고 쓰다젠으로부터 한문성경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문자를 따라 진리의 말씀을 전해 들으며 성령의 역사로 그 마음이 감동된 이수정은 성경책을들고 기쁜 마음으로 안내원을따라 쓰다젠의 집을 나섰습니다.


3. 이수정의 개종과 세례

  숙소로 돌아온 이수정은 신약전서 맨 첫 장인 마태복음서 1장을 펴 보는 순간 족보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당시 조선에서는 천민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족보를 가질 수 없었고 양반이나 벼슬을 하는 가문만이 족보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예수에게 족보가 있는 것을 보면서 예수는 양반신분임에 놀란 이수정은 피곤도 잊은 채 마태복음서를 단숨에 읽어 내려갔습니다.

  

  이튿날 쓰다젠의 집을 다시 방문한 이수정은 때마침 소다(長田施行) 목사와 동석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지도하겠다고 자청하는 그의 얼굴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의 얼굴 같았습니다. 이수정은 소다 목사의 안내를 받아 그가 시무하고 있는 레이란사까 교회에 잠시 머물면서 신앙지도를 받았습니다. 소다 목사에게서 성서대의를 배운 이수정은 일본에 건너온지 7개월만인 1883년 4월 29일 주일에 동경 노월정교회(현 시바‘芝’교회)에서 존 낙스(J. Knox) 목사의 입회하에 야쓰까와 목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음으로 조선사람으로 일본에서 최초로 세례교인이 되었습니다.


4. 성서번역과 선교사 유치운동

  이수정은 금단의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최선의 방법이 그 나라 말로 성경말씀을 담아 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마침 일본 주재 미국성서공회 총무로 있는 루미스 목사가 그에게 한국말로 성경을 번역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조선선교를 위해 한글성경의 제작이 시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수정은 루미스 선교사의 도움을 받으며 요코하마에서 현토한한성경, 즉 한자에 한글 토를 달아서 읽을 수 있게 하는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이어서 순수한글로 마가복음서 번역을 완성하고 1885년 1월 초 마가복음 1천부를 복음인쇄소에서 발간하였습니다. 1885년 4월 5일 인천항에 도착한 한국최초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손에 가득 들려있던 것이 바로 이 성경번역본이었습니다.

   

  이수정의 빛나는 업적 중에는 조선에 미국선교사 유치운동입니다. 그는 일본에서 한국에 선교사가 파송되기 전에 미국에서 직접 복음이 전해지길 소망하여 선교사 파견을 호소하였습니다. 이수정이 쓴 편지를 루미스 선교사가 번역하여 1884년 2회(7월, 12월)에 걸쳐 미국으로 보내졌고 선교사 유치운동에 관한 그의 서신이 미국의 선교잡지“더 미셔너리 리뷰 오브 더 월드”에 실리게 되었다. 이를 본 뉴욕의 젊은 실업가인 맥윌리엄스는 5천불을 약속하였고 미국 선교부를 움직여 한국선교사 유치운동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땅끝 나라 조선에 선교사 지망하는 미국신학생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이수정은 미국에서‘조선의 마케도니아인’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간절한 요청이 미국 교회지도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1884년 미국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함으로 1884년 9월 20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알렌 의료선교사가 입국을 하였고, 1885년 4월 5일에는 미국 감리교회에서 처음으로 파송된 아펜젤러, 그리고 미국 북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가 인천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아펜젤러는 1885년 2월 일본에 도착해 2개월가량 머물며 입국 준비를 하면서 이수정에게서 조선말과 조선의 풍속을 배웠습니다.

 

5. 일본에서 이수정의 눈부신 활약

 그 뿐만 아니라 이수정은 일본에서 한글로 성서를 번역하면서 조선에서 온 국비유학생들에게 영어로 성경을 배우게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한때 조선 유학생 30여명이 성경을 영어로 배우며 공부를 할 수 있게하는 등 그는 날로 일본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국제대학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는 강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 기독교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우찌무라간조가 이번에는 이수정형제가 대표기도 좀 하십시오. 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서 간절히 기도를 거침없이 물론 한국말로 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간절하게 '아멘' 하였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써 주었던 이수정의 친필 족자를 제가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성서연구 모임에서 인기가 높아지면서 '니주데이'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인기가 대단해지자 장사가 잘 안 되던 어느 제과점에서 "니주데이제과점" 이라고 붙여도 되겠느냐고 요청을 해서 허락했더니 그 제과점은 갑자기 인기가 올라가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세계선교역사에서 선교사가 처음 들어가면서 그 나라 말로 된 성경을 가지고 들어간 예가 없습니다. 그러나 첫발을 내딛는 아펜젤러 언더우드가 이수정이 일본에서 2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한글성경 마가복음서를 한 아름 안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없습니다. 그렇게 이수정은 일본에서 성서를 번역하고 미국인 선교사유치운동을 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의 개화파인물들과의 접촉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유로 조정의 보수파 들은 그를 일본유학생들과 함께 소환령을 받았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귀국하던 이수정은 1886년 5월 28일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44세의 젊은 나이에 경상도 울산에서 정적의 칼에 희생당하였습니다. 국법으로 엄금하는 기독교를 믿었고 이를 유학생들에게 전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을 번역한 큰 죄를 범했다는 이유로 응징된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결 론 

  문화와 문명을 찾고 행복을 찾는 길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길이라 믿었던 이수정은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문명의 여명을 모르고 어둠의 깊은 잠에 잠겨 있던 우리 조선을 일깨워 백성들을 무지와 가난과 전염병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기위하여 열정적으로 순교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수정은 이 땅의 복음화와 한글성경번역의 개척자로서 순교자적인 역할을 감당하였으며, 그가 남긴 말씀의 씨앗은 암흑 속에 갇혀 있던 이 땅을 밝혀 주는 등불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한국선교의 초석을 놓은 "한국기독교의 선구자"로 한국교회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문화관을 돌아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