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과 제암교회 순교자 23인
평화롭기만 하던 농촌마을 제암리에서는 1919년 4월 15일 오후 2시경, 일제의 만행에 의하여 방화 및 총살로 교인 23명이 순교하고 예배당을 비롯하여 마을전체가 불바다 되는 천인공노할 일이 벌어졌다. 이 일로 제암리는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일중에서 가장 잔혹한 만행의 하나로 손꼽히는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서울에서부터 전국적으로 일어난 만세운동의 여파가 화성일대에도 불어 닥쳤다. 3월 31일과 4월 5일 화성군 향남면과 장안면 일대에서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제암교회 성도들을 상대로 일제는 만세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행위를 획책하고 있었다.
![]() ![]() | ||
일본 경찰은 계획했던 수순에 따라 1919년 4월 15일 제암리 일대를 포위하고 15세 이상의 남자는 교회로 모이라고 했다. 그리고 제암리 교인들이 예배당으로 모이자 이때 일본 경찰들은 갑자기 폭도로 돌변하면서 교회로 찾아왔던 21명의 교인들을 예배당 안에 가두고 문에 못질을 하고 짚단을 쌓고 석유를 뿌리며 불을 질렀다. 그때 타오르는 불길 속에 갇혀있던 교인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찬송가를 부르며 신앙을 지키는 이가 있는가 하면 불길 속에서 창밖으로 뛰어내린 사람도 있었다. 더구나 불길을 보고 달려온 2명의 부녀자들에게까지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일본 경찰의 총탄으로 모두 23명이 무참히 죽어갔다고 당시 생존자 전동례 할머니는 증언하였다
이날 교회에 모이라고 하는 말에 아무런 의심 없이 찾아왔다가 제암교회에 감금되었던 남자 21명과 교회 밖 부녀자 2명 총 23명의 교인들은 이렇게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채 잔혹 무도한 일본 경찰의 만행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채 고귀한 목숨을 잃고 말았다. 더불어 동리 가옥 30여 채가 함께 불타는 비극을 맞았다. 이어 팔탄면 고주리에서는 김홍열 등 천도교 신자 6명이 학살을 당했는데 일본 경찰은 칼로 난도질한 후 시체를 나무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태워 버렸다. 사람, 가옥, 가축 등이 타는 냄새와 연기가 10㎞ 밖에까지 퍼져나갔으며 당시 이 일대에서는 우물물도 먹을 수가 없어서 식수 곤란을 겪기도 하였다.
이날 제암리에서 일어났던 살육과 방화의 광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것이었다. 누구도 겁에 질려 밖으로 나올 수도 없었으며 시신도 방치되는 상황이었다. 한편 이 사건을 전해들은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가 이곳을 찾아와서 처참한 상황을 목격하고 당시 현장의 모습을 몰래 사진에 담아 ‘수원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미국에 보내어 매스컴에 호소하므로 비로소 그 전모가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편 스코필드 선교사에 의해 불에 탄 교회에서 수습한 유골과 시신은 장례절차도 없이 인근 공동묘지에 한꺼번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 ![]() | ||
그 후 제암교회는 슬픔을 딛고 일어나 남은 자들의 신앙으로 교회를 지켜오던 중 1938년 기와집 예배당으로 재건되었다. 제암교회 순교자 23명에 대해서는 그 후 1970년에 비로소 일본 기독교인들이 지난날 일본사람들의 잘못을 사죄하는 마음으로 모은 성금 1000만 엔을 보내옴으로 제암교회와 순교자 유족회관을 건립하였다. 이때 일본인들에 대해서는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라고 하면서 가슴깊이 새기게 되었다. 기념회관을 건축하면서 하늘에서 보면 3․1정신을 상기하도록 숫자로 3자와 1자로 디자인해서 건축을 하였다.
제암리는 정부에 의해 대대적인 유해 발굴 작업이 실시되었다. 1982년 9월에 생존자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공동묘지에 묻혀있던 23인의 유해를 발굴하면서 개별 분류가 불가능함으로 교회 뒤편에 합장묘를 마련하고 온 교회와 제암리 주민들 그리고 매스컴에 보도되면서 온 국민의 애도 속에 합동장례를 치르고 그해 12월에는 사적 제299호로 지정하고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및 제암교회와 삼일운동 역사전시관 등이 건립되었다.
![]() ![]() | ||
그리고 이곳에 순교자 23명을 상징하는 돌 기념비 23개를 세워 그 숭고한 뜻을 기리며 큰 돌기둥에 크게 구멍을 내놓은 의미는 ‘어두운 미래 뒤의 밝은 희망을 본다’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기념관 내에 46명을 수용하는 시청각교육실에서는 ‘아! 제암리여!’ 라는 제목의 영상물을 관람할 수 있으며 제1전시관은 제암리의 3·1운동과 학살에 대해, 제2전시관은 일제 강점기의 역사와 전국의 만세운동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제암리 학살 사건은 기독교가 독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증명하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초창기 한국기독교가 교육과 의료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근대 민족주의의 배양을 통해 민족 지도자들을 양성하여 3·1운동을 주도했을 정도로 위상이 높았음을 보여준다. 1919년에 일어났던 3·1독립운동의 현장을 보며 당시 한국기독교인들의 애국심과 용기를 확인하고 오늘을 사는 우리는 민족의 자긍심을 가져야 할 것이며 기독교인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주소: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 산16 제암교회 역사전시관
- 글: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